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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금지된 삶 [김호성]

by joofe 2022. 6. 15.

 

 

 

금지된 삶 [김호성]

 

 

 

 

문고리를 돌린다

화분에는 물이 말랐고 남은 이파리는 밖을 향해 눕는데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가

같이 죽을 사람 하나 없는 나는 미궁으로 간다

식은 난로 아래 잿더미는 

본 적 없는 그림자를 화사하게 치장한다

간절하고 용서받고픈 자들의 적

그 앞에서 나는 절대 지치지 않는다

칼을 들어 고개 숙인 영혼들의 어깨를 찌르면 

그들은 몇 가지 제목을 발설하고 나를 추종하게 된다

원망하는 일은 한여름 도시처럼 질겨

폐가 망가진 시인도 담요를 뒤집어쓰고 웅크린다

책장이 솟아오르고 수돗물이 쏟아지는 귀 아픈 소리도

흥얼거리는 자장가로 변한다

살인자의 왕인 그림자에게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거울을 간직하고 있기에

깨어나면서 평온을 느끼지 못하는 물건이

더 나은 육체를 바라는 일이 정말 부질없는지를

잠이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월요일은 가르쳐 준다

발자국에서 새어 나온 모자이크들이 부유하고 있으므로

어제보다도 천천히

누군가로 살아야 하는 숙명을 넘겨받았다면 

나와 함께 모든 것을 망각할 수 없는 곳으로 가자

잠이 금지된 삶 속으로 가자

 

          - 적의의 정서, 파란시선, 2022

 

 

 

 

 

* 금지된 게 많다는 건 속박된 사회에 산다는 것일 게다.

한때 밤 열두시에 통행금지라는 게 있었다.

머리가 길면 장발이라고 붙잡아 바리깡으로 밀어버리거나, 치마가 짧으면 자를 들이대고 검사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진 '금지항목'이다.

하루 삼분지 일은 잠을 자므로서 몸의 균형을 잡고 면역력이 회복되는 것인데 잠을 금지한다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데모를 하지 않을까.

'나에게 잠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아침에 자명종 소리에 눈을 뜨지만 마음속으로는 아, 오분만 더!를 외친다.

오분의 잠이 고플만큼 열심히 산다는 증거이겠다.

잠을 자고 싶을 때 자고, 깨어있고 싶을 때 깨어있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잠이 금지된 삶 속으로는 가지 말자고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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