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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이 숟가락으로는 [나희덕]

by joofe 2022. 6. 26.

니콜라 랑크레(1690~1743)의 '정원에서 커피를 마시는 가족'

 

 

 

 

 

이 숟가락으로는 [나희덕]

 

 

 

 

그는 나무로 무엇이든 만든다

나무의 결과 무늬, 그 속에 깃든 형상에 따라

 

그가 만든 숟가락들은 말한다

세상의 모든 나무는 멋진 숟가락이 될 수 있다고

곧으면 곧은 대로 굽으면 굽은 대로

부서지고 불 탄 흔적이 있어도 버리지 않는다

 

손끝으로 집어야 할 만큼 짧은 숟가락도 있고

너무 길어서 다른 이에게만 떠먹일 수 있는 숟가락도 있다

 

작고 오목한 면만 있으면 숟가락이 된다

입에 들어갈 무언가를 한 술 담을 수만 있다면

 

물이든 밥알이든 푸성귀든 국물이든 고기 건더기든

목숨을 위해 무엇이든 실어나르는 도구

 

밥그릇을 빼앗고 숟가락을 분지르는 사람들을 보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버려진 나무로 숟가락을 깎는 일이었다

 

숟가락 싸움 밥그릇 싸움 앞에서 그는

묵묵히 숟가락을 만들었다

스테인레스나 플라스틱이 아니라 나무로 된 숟가락을

 

작은 나무토막, 심지어 가지나 껍질까지도

숟가락의 재료가 되어 주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숟가락도 만들고

조개껍데기를 이어붙인 조개숟가락도 만들면서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이 순한 숟가락들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무기라고

한 술 한 술 누군가 떠먹이며 살아야겠다고

 

그래서 그가 만든 어떤 숟가락은 작은 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숟가락으로는 무엇을 먹을까 먹일 수 있을까

 

               - 시와편견 22년 여름호

 

 

 

 

 

 

 

* 수천년 전부터 작고 오목한 숟가락을 만들어 사랑을 담아 떠먹이며 떠먹으며 살았을 인류.

숟가락에 얹어진 것은 사랑이고 삶이고 종족을 지키는 무기였을 것이다.

공중을 나는 새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는다지만

인간은 무엇을 먹일까 무엇을 먹을까를 걱정하며 살았을 테고

돌멩이로 나무의 오목한 면을 절차탁마했을 것이다.

손재주도 늘고 철기를 만들 줄 알게 되면서 숟가락은 진화했을 것이고

인간의 먹거리도 다양해졌을 테다.

평생 나를 떠먹이고 살게 해준 숟가락에 신은 혼을 불어넣어 주었으니 고스란히 나의 영혼이 되어준 숟가락이다.

그러니 신이시여, 죽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 힘을 남겨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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