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역 [이은규]
누군가 두고 간 가을
홍역처럼 붉다, 라는 문장을 썼다 지운다
무엇이든 늦된 아이
병(病)에는 누구보다 눈이 밝아
눈이 붉어지도록 밝아
왜 병은 저곳이 아닌 이곳에 도착했을까
답이 없는 질문과 질문이 없는 답을 떠올린다
안으로부터 차오르는 열매
나는 병력을 지우고
붉은 몸을 잘 표백시키는 사람들을
조금 부러워했나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조금 부러워했나
기다리지 않아도 돌아오는 절기
혼자 부르는 돌림노래에 공을 들이고
그것만은, 포기하지 않기 위해 손을 모을 뿐
저기 핑그르르 수면을 도는 단풍잎
같은 병을 다르게 앓지 못한 우리들은
왜 약속 없이 나누는 역병처럼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서만 생각했을까
붉어지는 열매 금세 핑 도는 울음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아닌
그래서 나는 오늘
질문이 없는 답에 쉽게 고개를 끄덕여버린
오랜 부끄러움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
잘못된 문장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멀리서 가까이서 도착할 소식들에 귀를 열고
이제 질문이 없는 답을 내내 의심할 것
홍역처럼 붉다, 라는 문장을 지웠다 쓴다
누군가 두고 간 가을
-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문학동네, 2019
* 천안에서 드립커피를 가장 잘 내리는 집을 꼽으라면
언덕위의 커피나무와 산타클라라를 추천한다.
언덕위의 커피나무는 십수년 단골이고
산타클라라는 팔년쯤 되었다. 직장 동료가 퇴직하고 하는 커피집이다.
산타클라라 입구에는 남천이 홍역처럼 붉게 서서 손님을 맞는다.
입구 옆은 넓은 창으로 되어있고 길건너에도 남천이 붉게 서있다.
명호, 저거도 니가 심은 거니?
- 응. 내가 심었지.
잘 했다. 좋아.
케냐 한 봉다리 줘라, 했더니 케냐는 볶은 게 없다며 과테말라를 준다.
한때 과테말라만 먹던 때를 떠올리며
집에서 드립으로 마시니 홍역을 앓았을 때처럼 얼굴이 붉어진다.
황홀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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