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미로 [신철규]
통화 중에 금방 전화할게, 하고 전화를 끊은 네가
다시 전화를 하지 않는다
나는 전화기 옆에서 서성대다가
열없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책상 모서리를 송끝으로 따라가다가
다시 전화기를 본다
검은 액정 화면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약속이 있고 시간을 어기지 않기 위해 이제는 씻어
야 하지만 전화가
오지 않는다 양치질하는 동안에도 전화가 오지
않는다 입가에 치약 거품을 묻힌 채 전화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샤워기를 틀기까지 또 몇 초간 기다린다
미지근한 기다림이 계속된다
수도꼭지를 돌리니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떨어지고
비누칠을 하기까지 몇 분간 나는 덩그러니 욕조에 서 있
었다
교통사고라도 난 걸까
노트북에 커피라도 쏟은 걸까
행인에게 갑작스럽게 폭행을 당한 건 아닐까
피가 흥건한 단도가 햇빛 가득한 보도 위에 반짝이고 있다
샤워를 마치고 젖은 몸으로 욕실화를 신은 순간
다시 전화가 온다
미끄러운 손가락으로 간신히 전화기를 부여잡는다
무슨 일이야? 큰일이라도 난 거야?
아니야 그냥 전화했어.
담장에 장미가 많이 피었어.
거울 속에 눈물이 가득 차 쏟아질 것 같다
붉게 달아오른 피가 온몸에 장미 문신을 그려놓는다
빠져나가지 못한 그을음이 목구멍을 가득 메운다
- 심장보다 높이, 창비, 2022
* 일천구백팔십년도에는 집에 전화기가 있는 집이 있었고 없는 집도 있었다.
우리집은 전화기가 없었고 주로 공중전화로 걸거나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연애를 하려해도 편지를 부쳐서 어느날 몇 시에 어디에서 만나자고 해야 했다.
만나는 장소는 물론 종로서적 앞이었다. 그땐 그랬다.
형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여 취직준비 중에 유명제과회사에서 전화를 학교로 통지하여
학교로부터 전달 받지 못해 취직을 하지 못하고 한참 뒤에 제약회사에 들어갔다.
일천구백팔십구년 쯤 첫 직장이 경주여서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 땐데
퇴근해보니 아가와 아가엄마가 없는 거였다.
전화도 안 되고 쪽지도 없이 집을 나가버렸으니 오만 잡생각이 났었다.
밤 아홉시쯤 돌아왔다. 울산 친구집에 갔다가 늦었다는 거다.
그때 내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 주민등록증은 가지고 다닌거야?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핸드폰을 들고 다니니 언제 어디서나 통화만 되면 안부와 안위를
확인할 수 있다.
참 좋은 세상이긴 한데 핸드폰을 걸었는데 안 받으면 걱정되기는 마찬가지다.
- 무슨 일이야? 큰일이라도 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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