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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시클라멘 [송종규]

by joofe 2022. 7. 23.

 

 

시클라멘 [송종규]

 

 

 

 

지난 봄 어느 날

내 미열의 이마를 짚어주던 그의 손에는

두근거리는 봄밤의 향기가 묻어 있었다

그의 순결을 믿었으므로 나는 쉽게

나의 상처를 꺼내들고

그의 순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봄이 지나가고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감기 앓는 내 이마를 짚어주는 그의 손에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봄밤의 향기가 묻어 있지만 

이제는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다

손가락에 불을 지펴

두근거림만으로도 꽃이 되는 비밀을 

보여주는 그에게

나의 상처는 얼마나 가볍고 오만한가

 

불현듯 다가서는 한 토막, 어린 날의 기억처럼

그는 왔다

그의 붉은 꽃 그늘이 거느리고 있는

뜨거운 말을 

더듬거리며 누가 읽고 있다

말이 강물을 이룬다 한들, 어떻게

붉은 꽃 그늘의 비밀을 해독해 낼 수 있을 것인가

 

그 봄에는 아무도 꽃 피지 않았다

 

              - 고요한 입술, 민음사, 1997

 

 

 

 

 

* 시클라멘을 알게 된 건 일천구백팔십삼년.

이름이 잘 외워지지 않아서 '싱크대라면'으로 기억했다.

(어릴 땐 이런 식으로 암기했었다.)

참 예쁜 꽃이라고 생각하고 언젠가는 화분을 사보리라 마음 먹었다.

향기를 맡아본 적은 없고 붉은 꽃과 하얀 꽃중 하얀 꽃이 순결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여전히 꽃은 예쁘지만 화분은 사지 않는다.

꽃 그늘의 비밀 때문이기도 하고 해독이 안된다는 생각에서다.

가끔 꽃집에서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

어! 싱크대라면이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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