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감상

심장보다 높이 [신철규]

by joofe 2022. 8. 8.

선진국에도 홍수가...

 

 

 

 

 

심장보다 높이 [신철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전기가 나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녹슨 슬픔들이 떠오른다

어두운 복도를 겁에 질린 아이가 뛰어간다

 

바깥에 아무도 없어요?

내 목소리가 텅 빈 욕실을 울리면서 오래 떠다니다가 멈춘다

 

심장은 자신보다 높은 곳에 피를 보내기 위해 쉬지 않고 뛴다

중력은 피를 끌어 내리고

심장은 중력보다 강한 힘으로 피를 곳곳에 흘려 보낸다

 

발가락 끝에 도달한 피는 돌아올 때 무슨 생각을 할까

해안선 같은 발가락들을 바라본다

 

우리가 죽을 때 심장과 영혼은 동시에 멈출까

뇌는 피를 달라고 아우성칠 테고

산소가 부족해진 폐는 조금씩 가라앉고 

피가 몸을 돌던 중에 심장이 멈추면

더이상 추진력을 잃은 피는 머뭇거리고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고

할 말을 찾지 못해 바싹 탄 입술처럼

그때 내 영혼은 내 몸 어딘가에 멈춰 있을까

 

물이 심장보다 높이 차오를 때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깊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무의식중에 손을 머리 위로 추켜 올린다

 

무너질 수 없는 것들이 무너지고 가라앉으면 안 되는 것들이 가라앉았다

꿈속의 얼굴들은 반죽처럼 흘러내렸다

덜 지운 낙서처럼 흐릿하고 지저분했다

 

누군가가 구겨버린 꿈

누군가가 짓밟아버린 꿈

 

어떤 기억은 심장에 새겨지기도 한다

심장이 뛸 때마다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번져간다

 

나는 무섭고 외로워서 물속에서 울었다

무섭기 때문에 외로웠고

외롭기 때문에 무서웠다

고양이가 앞발로 욕실 문을 긁고 있다

 

다시 전기가 들어오고 불이 켜진다

물방울을 매달고 있는 흐린 천장이 눈에 들어오고

 

어둠과 빛 사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서로를 조금씩 잃어가면서

서로를 조금씩 빼앗으면서

 

납덩이가 된 심장이 온몸을 내리누른다

 

                - 심장보다 높이, 창비, 2022

 

 

 

 

* 인간은 수영을 배우는 동물이다.

홍수가 나도 다른 동물들은 수영을 해서 살아나지만 인간은 수영을 배운 사람만 살아난다.

죽는다는 것은 숨이 끊어지거나 심장이 멈추거나 하는 것이고 영혼 마저 몸을 떠나면 영원히 죽는 것이다.

태어나기 전에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유영을 했을 것이나 몸밖으로 나와서는 수영하는 법을 잊어버려

물에 대한 공포를 갖는다.

아직 수영을 배우지 못한 나는 가능하면 배를 타지 않으려고 하고 물놀이를 즐겨하지 않는다.

어릴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기억과 개에게 물린 기억은 평생 트라우마라 물과 개는 멀리 하는 편이다.

심장이 늘 일을 잘 하는 것은 아니어서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어느 부분에서 피돌기가 멈추면

숨도 못쉬고 쓰러진다.

쓰러지고 십분 이내에 조치가 되지 않으면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거나 더 시간을 허비하면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가끔 티비에서 지나가던 행인이 쓰러진 사람을 응급처치를 해서 생명을 구했다는 뉴스를 본다.

나는 아직까지 누구에게 응급처치를 해본 적은 없지만 학교 다닐 때 FA(First  Aid)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나를 응급처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불안감은 늘 존재한다.

요즘처럼 물폭탄이 하늘에서 내리고 불볕과 산불이 덮치는 세상에서 그리고 전쟁으로 강력한 포탄이 떨어지는 세상에서

심장보다 높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불안한 요소들이다.

점점 무질서해지는 세상이지만 질서정연함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