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대추나무는 벼락을 맞고 [성선경]
내 도장은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것
이것을 나는 무슨 벽사의 부적처럼 여기고
주머니 안에 넣어 다니며 몰래
남몰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만지작거리고
무슨 못 들을 말을 듣거나
못 볼 일을 보게 되면 만지작거리고
벽사의 주문처럼 웅얼거리고
이 대추나무 뼈다귀를 움켜쥐게 된다
알고 보면 모든 대추나무는 벼락을 맞고
이 벼락 맞은 대추나무 뼈다귀들이
축제의 난전에서 도장으로 환생하지만
그래도 참 이딴 것에 하고 우스워도 하지만
이는 정말 잘 모르고 하는 일
벼락에 맞는 일은 환골하는 일
벼락을 맞는 일은 탈태하는 일
한 생애를 뛰어넘는 일이다. 나도
언젠가 벼락을 맞아봐서 안다. 그래서
벼락 맞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안다
내 도장은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것.
- 까마중이 머루 알처럼 까맣게 익어 갈 때, 파란, 2018
* 일천구백팔십육년, 첫 직장이 경주에 있는 회사였다.
서울의 한 동 정도의 자그마한 도시였는데 가끔 야시장이 열렸다.
퇴근하고 야시장을 구경하는데 구석진 곳에서 도장을 파는 아저씨가 보였다.
마침 회사에서는 도장을 찍어 결재를 올려서 하나를 팠다.
성은 없고 이름 두 자만 아주 조그만 크기로 도장을 새겨 주셨다.
- 이거 벼락 맞은 대추나무라 평생 쓸 겁니다.
라는 멘트를 날리며 작고 길고 반들반들한 도장을 건네 주셨다.
이 도장은 대리 직급으로 일할 때까지는 사용했던 것 같고
언제부턴가 도장 대신 사인으로 결재를 하게 되어 지금은 서랍속에서 굴러다닌다.
해마다 열매를 더한다는 대추나무의 다산 정신을 좋아하고
벼락 맞고 환골탈태하는 변화의 의지를 좋아한다.
진하게 우린 대추차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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