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나라 [장석주]
1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젊은 날의 첫 아내가 사는 고향
지금은 모르는 언덕들이 생기고
말없이 해떨어지면 묘비 비스듬히 기울어
계곡의 가재들도 물그늘로 흉한 몸 숨기는 곳
이미 십년 전부터 임신 중인 나의 아내
만삭이 되었어도 그 자태는 요염하게 아름다우리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연기가 토해내는 굴뚝
속에서 꾸역꾸역 나타나는 굴뚝 아래
검은 공기 속에서 낙과처럼 추락하는
흰새들의 어두운 하늘 애꾸눈 개들이
희디흰 대낮의 거리에서 수은을 토한다
- 수은을 먹고 흘리는 수은의 눈물,
눈물방울
절벽 같은 천둥번개 같은
2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달의 엉덩이가 구릉에 걸리고
너도밤나무 숲속 위의 하늘에도 그리운
물고기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자주 발견된다
아내의 지느러미는 여전히 매끄럽고 그동안
낳은 딸들은 낙엽 밑에 잠들어 있으리 내 아내는
여전히 낮엔 박쥐들을 재우고
밤엔 붉고 검은 땅에 엎드려 알을 낳으리
아내의 삶에 약간의 이끼가 낀 것이
변화의 전부이다 내 앞가슴의
거추장스러운 의문의 단추들이 툭툭 떨어진다
3
나는 밤에 도착한다 지난
여름의 장마로 끊긴 다리의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눈치 빠른 새앙쥐들은 낯선 침입자를
힐끗거리고 무심한 아내는 자전거만 타고 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의 흰 종아리가
자전거의 페달을 힘차게 밟을 때마다
스커트자락 밑으로 아름답게 드러나곤 한다 아아
너무 늦게 돌아왔구나 내 경솔함 때문에
빠르게 날이 어두워진다 그동안 아내의
입덧은 얼마나 심하였던가 유실수의
성한 열매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최후의 시장에서 인신매매업으로 치부를 할 때
아내는 날개 달린 다람쥐처럼 날아다녔으리라
너도밤나무 과의 북가시나무 숲속 위로 열린 하늘엔
죽은 사람의 장례가 나가고 바람을 방목하는
언덕의 숲속에서 누가 지느러미도 달리지 않은
사람의 아들을 낳는다 그림처럼 누운 아내의 입술에
내 입술이 닿기도 전 아내는 힘없이 부서져내린다
그리움은 그렇게 컸구나
머릿속의 우글거리는 딱정벌레들을 한 마리씩 풀어 주어
내 머릿속은 빈 병실 같다 피안교를 건너서
내일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다시 최후의 시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 그리운 나라, 평민사, 1986
* 그리운 나라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시월이 되면 바로 그리운 나라에 입성해서 사는 것이다.
봄이면 지천으로 노랑꽃 하얀꽃 붉은꽃으로 흥분하다가
여름이면 지친 더위에 수박이며 참외며 미친 듯 그늘 아래서 폭염을 증오하다가
마침내 기다리던 시월이 오면 마음이 아늑해지는 것이다.
평온해지는 것이다.
월정사의 시원한 전나무숲길을 거닐거나
동강의 카페 낮달에 가서 화가가 직접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거나
화가가 첫수확이라고 싸준 한 봉지 사과를 오래도록 아삭아삭 깨물어 먹거나......
그리운 나라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어디에선가 시월이구나, 시 한 편 읽고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
여기가 그리운 나라가 되는 것이다.
차곡차곡 쌓이는 좋은 기억이 그리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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