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푸치노 [최금진]
거품에도 맛이 있다는 걸 알아낸 건 수도원의 수사들일까
웃음이 죄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듯이
굳게 턱뼈를 다물고 나면, 어디든 걸어갈 용기가 생기곤 했지
그곳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더라도
공기처럼 너의 방으로 스며들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곤 했지
저녁 들판을 태워 한 줌 재로 만드는 상상 속에서
종이에 편지를 쓰곤 했지
거짓말, 거짓말, 이라고 쓴 긴급 전보를 받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나무 냄새가 나는 상자에 들어가 커피콩처럼 웅크려도 좋았어
세계는 손잡이가 없어서 누구도 열어 볼 수 없고
마른 빵을 먹는 일에도 저토록 진지한 몰입이 필요한 법이어서
나는 자꾸 눈물이 났지, 종이를 부드럽게 구겨서 닦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카푸치노를 마시고 싶어
얼룩무늬 젖소가 제 커다란 몸을 쥐어짜서 내놓은 한 잔의 우유에
어떤 공포가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녔는지 알 거 같아
어떤 연약한 것이 뿔로 돋아 저를 지켜내고 싶었는지
카푸치노는 신의 촌스러운 억양 같은 것
그가 대지의 숨통을 누르고 뽑아낸 시커먼 한 양동이 물과 같은 것
내 혈액 속으로 흘러들어와 고함을 치다가
조용히 어깨동무를 풀고 돌아가는 안개를 본다
뿌옇게 흐려져 가기만 하는 나를 누군가 이해해 주길 바란다
카푸치노를 마신다고 생각한 것이
이토록 연거푸 모자란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들판에선 들불을 놓는 늙은이가
막대기로 불을 톡톡 건드려 때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따스함이란 따스함은 모두 데리고 가고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는 걸까
거짓말, 거짓말, 이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조금은 웃고 있는 걸까
- 시로 여는 세상, 2021년 가을호
* 한때 카푸치노에 꽂혀 마셨던 시절이 있었다.
동네 길모퉁이에 조그만 카페였는데 주업종은 술이었고
커피는 아메리카노와 카푸치노를 팔았다.
직원들과 회식 2차로 가면 다시 술을 마시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나는 커피를 마셨다.
그때 카푸치노를 처음 마셨는데 제법 맛이 있었다.
주인여자는 열살 아래인 것 같았는데 '커피 맛있게 만들죠?'라며 어깨를 으쓱거리곤 했다.
이천이년 월드컵 축구할 때 우리나라가 유럽의 어느 팀을 이기자
카페에서 술 마시던 손님 한분이 '이 홀안에 있는 거 내가 다 쏜다!'라고 소리쳐서
다같이 어깨 부둥켜 안고 춤추고 '대한민국'을 외쳤던 생각이 난다.
주인여자도 홀안에 들어와 함께 춤추었던......
그후로 얼마 안되어 황태해장국을 파는 국밥집으로 바뀌고 한번 갔다가 결국 금방 문을 닫았다.
이후로 다른 카페에 가보아도 그 주인여자만큼 맛있는 카푸치노를 내오는 집이 없었다.
가을이 가기 전에 수도사처럼 거품에도 맛이 있다는 걸 깨닫기 위해 카페 투어를 좀 해볼까나.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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