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감상

회색의 시 [이기성]

by joofe 2021. 11. 16.

올해가 신축년. 소띠해다. (인터넷에서 퍼온 자강님의 그림) 소는 죽을 때까지 일만 한다.ㅠ,ㅠ

 

회색의 시 [이기성]

 

 

 

 

그 애가 회색이 되겠다고 했을 때 모두 웃었다

모두가 웃을 때 그 애는 조금 회색이 되었으려나

 

눈과 코와 동그란 입이 각자의 회색으로 천천히 희미해지고

결국은 회색이 되었을 때 어떤 얼굴에선 조금 눈물이 흘렀으려나

 

우리는 입을 꾹 다물고 산책을 떠났다

따뜻한 밥과 국을 나눠 먹고 차를 마시고

공원에서 나무들이 아래로 자라는 것을 보았다

못생긴 개미들이 회색 지구 위를 기어서 기어서 갔다

 

보이지 않는 새가 줄곧 울고 있었다

 

그 애가 회색이 되겠다고 했을 때

미친 듯이 웃었다 우리는

먼지로 가득찬 커다란 구멍을 벌리고

 

그것은 회색의 시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 동물의 자서전, 문학과지성사, 2020

 

 

 

 

 

* 일곱색깔 무지개는 가장 눈에 띄는 순서로 정해졌다.

빨주노초파남보!

가장 눈에 확 들어오는 빨간 장미는 꽃의 여왕인가?

노랑색꽃들도 치열하게 뭉쳐 피면서 나를 알아줘, 애교를 떤다.

좋겠다. 늬들은 눈에 잘 띄어서!

뒤로 갈수록 눈에 잘 안보이겠지만 그래도 무지개색들은 나름 예쁘다.

무채색인 흰색과 검정색도 그나마 고결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해서 제법 눈에 띈다만

회색은 이도저도 아닌 것이 저 구석탱이에서 비웃음이나 사고 있다.

그러니 회색이 되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웃지 않는가.

 

비웃음을 사는 회색의 나이가 되면 까만 머리에 흰머리가 삐죽삐죽 

나, 회색이 되었다! 티를 내고 있다.

하얀 백발이든지 아니면 염색해서 새까만 머리가 되든지 하면 좀 나은 편이다.

왜, 회색이 어때서?라고 얘기해봐야 미친 듯이 웃는 사람들이 모여들겠지.

 

엊그제 회갑이 되어서 회색인간이 되었다! 젠장.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와디 럼* [최현우]  (0) 2021.11.20
어린 순례자 [우대식]  (0) 2021.11.18
춘천 명곡사 [이사라]  (0) 2021.11.16
작은 신이 되는 날 [김선우]  (0) 2021.11.15
카푸치노 [최금진]  (0) 2021.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