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꽃 [김수우]
할아버지가 심었다는 늙은 대추나무
통통통 붉은 대추 줍는 손녀들 발자국마다 빛방울이 튄다
할아버지는 흰 대추꽃을 닮았다
어느 결에 피었던가 소문도 없이 꽃자리들, 영글었다
사막 아이들도 대추야자를 물고 놀았다 팔레스타인, 사하
라, 그곳 할아버지도 굽이굽이 대추나무를 심었다 메마른
황야에서 대추를 딸 손녀들을 믿었다 심는 것은 믿는 것이
다 죽은 뒤에 마주 보는 충실한 약속
대추꽃은 신을 닮았다
보이지 않는 꽃자리들, 어느 결에 지면서 사람을 믿고 있
었나
백살 대추나무 아래 영그는 햇빛 달빛, 굽이도는 할아버
지가 굽이굽이 준비한 유품이다 믿는 것은 심어야 한다 할
아버지가 심은 것은 제물(祭物)의 허기를 채우는 붉은 독경
신은 두엄 내는 할아버지를 닮았다 보이지 않는 밤과 낮
을 예비한다
신들에게 피고 지는 법, 기도하는 법, 기다리는 법을 가르
치던 아득한 할아버지
대추 줍는 아이들은 읽어낼까
어느 결에 피고 진 지구를 밝히고 떠난
흔들리는 영원의 속눈썹을
- 뿌리주의자, 창비, 2021
* 결혼한 신랑 신부에게 밤과 대추를 툭 던져주는 풍습.
밤한톨은 땅에 묻혀 싹을 틔우고 나무가 되어도 그 밤톨은 그모습 그대로를 간직한다.
변하지 말고 집안의 뿌리를 지키라는 말이다.
대추는 해마다 열매를 더하는 것을 의미하니 다산하라는 말이다.
밤과 대추가 주는 의미는 가계를 잘 번성토록하라는 게다.
하얀 대추꽃이 피고지면 정말 대추열매가 열릴까 궁금해 하지만
할아버지가 유품 남기듯 반드시 통통한 대추가 열린다.
대추를 줍고 딸 때마다 할아버지가 사는 법을 알려준 충실한 사랑을 느낀다.
대추를 보고 안 먹으면 늙는대!
해마다 듣는 그 말씀도 달큰한 추억의 대추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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