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감상

멍 [정현우]

by joofe 2021. 11. 22.

'앉아있는 데몬' 미하일 브루벨 그림

 

멍 [정현우]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따귀를 맞았다. 맨발로 집을 뛰쳐나

왔다. 넝쿨이 울창한 성당은 멍든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떨

어진 포도알에는 천사의 날개가 들어 있을지도 몰라 맨발로

밟았다. 자줏빛 혈관을. 첨탑 사이로 빠져나가는 구름과 그

늘에 접힌 종소리를, 멍든 뺨을 어루만졌다. 발목으로부터

터지는 울분, 어둠에도 무게가 있다는데, 발자국을 내버린

까마귀의 허공, 슬쩍 날개 대신 다리를 내민 천사의 오후, 천

사들이 가져가는 몫은* 포도의 주검과 시간 사이, 양손으로

한움큼 포도알을 담아 천사에게 내밀었다. 무질서하게 열리

는 마음, 포도알을 입안에 넣으면 감돌다 마는 천사의 피 맛,

바닥에 숨이 붙어 있는 포도알이나 영혼이나 모두 썩고 나

면 그만인데, 뒤로 물러서는 천사의 침묵. 미사를 마친 사람

들이 알약처럼 쏟아져 나왔다. 정적 속에 숨어 있는 포도 씨.

멍울을 깁다 보랏빛이 얇게 잡히는 멍의 끝, 더이상 오를 곳

없는 햇빛에 구부러지는 포도 넝쿨들.

 

 

* 천사들도 술을 마신다. 포도주가 오크통에서 숙성되는 동안 일

부는 공기중으로 사라지는데, 이를 '천사의 몫'이라고 한다.

 

 

                    -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2021

 

 

 

 

 

*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는데 부모가 자식을 때리는 게 결코 사랑의 매가 될 순 없다.

부모로 살면서 아이를 한번도 안 때렸다면 거짓말일 수 있다.

진짜 안 때린 사람도 있긴하겠다마는.

나도 아이들이 대여섯살일 때까지는 엉덩이를 두들긴 적이 있다.

이 때의 기억을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기억하는 걸 보면서 

진짜 꽃으로도 때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중이 때 담임선생님은 도덕을 가르쳤다.

추석을 앞둔 날 종례시간에 추석 잘 쇠고 오라면서 어디들 가냐고 물었다.

한 친구가 삼수갑산이요!라고 말하자

너 나와 이 새꺄!라고 큰 소리를 치더니 퍽,퍽,퍽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칠십년대 초반이라 그 땐 선생님의 그림자도 감히 밟을 수 없던 때여서

그게 부당하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삼수와 갑산은 함경도에 있는 지명이고 유배지로 유명한 곳인데

이 친구는 왜 무슨 의도로 삼수갑산이라고 말 했는지

선생님은 왜 격분해서 무차별 폭행을 한 건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요즘 학폭이라는 단어가 뉴스를 장식하며 과거의 일들이 줄줄이 방송을 타고 있다.

성폭이다 학폭이다 심지어는 부모의 빚까지도 미투,미투, 미투다.

이것도 80대 20의 법칙을 따르는 건지 대체로 80은 맞고 20은 거짓이다.

방송을 타는 즉시 공분을 하는 게 유행이 되었다.

거짓으로 폭로하는 경우, 미투의 물결에 희생양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끝까지 지켜봐야 되는데 이,삼년 뒤에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도 이미 희생양이 된 사람은 

이 땅에서 살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섬 [정용주]  (1) 2021.11.27
대추꽃 [김수우]  (0) 2021.11.27
어두워서 좋은 지금 [박소유]  (0) 2021.11.22
부탄 [강신애]  (0) 2021.11.20
와디 럼* [최현우]  (0) 2021.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