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맑은 날 [김안녕]
나 닮은 여인을 제주에서 보았다고 그는 전화를 했다
나처럼 어여쁜 여인이 또 있더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상계동에서 옛날 맛이 나는
고추장수제비를 현아 언니와 둘이 먹는다
혀를 데면서도 끝없이 땀방울을 흘리면서도
여름은 사랑할 수밖에
비도 안 오는데 괜히 옛날 생각
새빨간 수제비 맵다고 울고 싶은 수제비
그래도 우리는 수제비를 포기할 수 없고
팔월에도 내년 여름에도 십 년 뒤에도 또 올 테지?
얼룩덜룩한 얼굴로 누군가 흘러내린 벽지처럼 웃는다
울다가 웃는 사람의 얼굴은 모두 닮아 있고
비린 풀밭들 은행사거리와 당고개와 덕능고개 넘어가다 보면
별내가 나오고 집이 나온다
33번 대신 80번을 탔으면 좋았을걸
머리를 좀 더 굴렸으면 좋았을걸
시는, 안 썼으면 좋았을걸
모든 게 수제비 탓이다
- 사랑의 근력, 걷는사람, 2021
*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고 2000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했다.
시집'불량제리'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냈다.
요렇게 쓰면 아, 김은경시인! 하고 금방 알아챌 것이다.
그런데 김은경시인과는 안녕하고 새롭게 안녕하려고 김안녕시인으로 변신하셨다.
혹시 시집을 새로 내셨을라나, 알라딘을 검색 또 검색을 했었는데
김안녕시인으로 변신하실 줄이야.
수제비는 동글동글 뭉치고 치대고 또 뭉치고 치대고선 한 삼십분 숙성시켜야 쫄깃쫄깃해진다.
그리고 나서 펄펄 끓는 육수에 옛날맛 나게 대충대충 떼어넣으면 맛있는 수제비가 완성된다.
김안녕시인이 근력이 있는 수제비를 만드느라 당고개와 덕능고개를 넘고 넘으신 게다.
모든 게 수제비 탓이다. ^^*
오래된골목님, 세번째 시집 상재를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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