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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비단길앞잡이 [윤은성]

by joofe 2021. 12. 6.

비단길앞잡이

 

 

비단길앞잡이 [윤은성]

 

 

 

 

여기만 지나면 마을이 나온다고 그가 말한다.

터널 안에서.

우리를 지나치고 있는 생각들 안에서.

 

빛. 따갑다. 우리는 드러날 것이다.

각자의 바뀐 옷가지를 그대로 걸치고서.

아이의 형상에 또 다른 아이의 형상이 겹치면서.

 

운전대를 쥔 그의 손이

내게서 멀어진다.

 

그가 다리 위에 서 있다.

내가 그의 사진을 찍어준다.

 

빛. 날벌레들이 달라붙는 오후.

그의 뒤로 조깅하는 커플이 천천히 사라진다.

 

굴뚝.

연기.

그을음이 인 것 같은 얼굴.

목이 탄다.

 

시기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이사를 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가 도와주었겠지. 내가 혼자서 마칠 수는 없었을 때니까.

 

그는 광장을 배회하고 돌아오곤 했다. 나도 같이 가자고 말한 적이 있었다.

군중에 섞였고. 옳은 것이 있었고.

 

여기만 지나면

한 번도 발 디뎌본 적 없었던 마을이.

 

안팎.

이분二分.

백일하.

다시 계속되는 터널.

우리가 우리라는 공기로 덮일 수 있었을 때.

 

해가 지게 될 것인데.

따가운 빛일망정 사라질 시각이 올 것인데.

 

길이 넓고 환하고.

서로를 놓게 되는 오후.

 

아주 작은 너를 봤어.

나를 모르는 너를 봤어.

멀리서

이미 터널의 밖에 있는

내가 모르는 너를 봤어.

 

갈증이.

 

갈증이.

 

          -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1

 

 

 

 

 

* 꽃길만 걸어라. 비단길만 걸어라.

기나긴 인생길이 꽃길만 있을 수 없고 비단길만 있을 수 없다.

人生의 生자는 소가 땅을 디디고 있는 모습이니 평생 소처럼 일하며 사는 게 인생이다.

누군가 비단길은 아니라도 길앞잡이가 되어 터널을 지나고 넓은 길로 인도해준다면 수월하게 가는 인생길이겠다.

늘 마주치는 인생길.

여기만 지나면, 또 여기만 지나면......

터널같은 길이 여기만, 여기만이다.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닌데 늘 헤매는 게 길이다.

누가 비단길앞잡이가 되어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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