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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지게體 [손택수]

by joofe 2021. 12. 16.

오시인의 탁번체.ㅎ

 

지게體 [손택수]

 

 

 

 

부산진 시장에서 화물전표 글씨는 아버지 전담이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아버지가 시장에서 대접을 받은 건

순전히 필체 하나 때문이었다

전국 시장에 너거 아부지 글씨 안 간 데가 없을끼다 아마

지게 지던 손으로 우찌 그리 비단 같은 글씨가 나왔겠노

왕희지 저리 가라, 궁체도 민체도 아이고 그기

진시장 지게체 아이가

숙부님 말로는 학교에 간 동생들을 기다리며 

집안 살림 틈틈이 펜글씨 독본을 연습했다고 한다

글씨체를 물려주고 싶으셨던지 어린 손을 쥐고

자꾸만 삐뚤어지는 글씨에 가만히 호흡을 실어주던 손

손바닥의 못이 따끔거려서 일찌감치 악필을 선언하고 말았지만

일당벌이 지게를 지시던 당신처럼 나도

펜을 쥐고 일용할 양식을 찾는다

모이를 쪼는 비둘기 부리처럼 펜 끝을 콕콕거린다

비록 물려받지는 못했으나 획을 함께 긋던 숨결이 들릴 것도 같다

이제는 지상에 없는 지게체

 

             -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2020

 

 

 

 

 

* 학교 다닐 때 친구의 리포트를 그대로 베껴서 냈는데 

친구는 에이를 받고 나는 삐를 받았다.

친구는 계집애처럼 잘 쓴 글씨체였고

나는 약간 흘려쓰는 흘려체였기 때문이다.

글씨를 잘 쓰면 옛날에는 임금 옆에서 사관을 했고

육십년대는 면사무소에서 행정을 봤을 테다.

지금은 글씨체로 밥먹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면 각종 서체가 나오니 참 편리한 세상이긴 하다.

그럼에도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보면 얼굴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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