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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미로 [신철규] 침묵의 미로 [신철규] 통화 중에 금방 전화할게, 하고 전화를 끊은 네가 다시 전화를 하지 않는다 나는 전화기 옆에서 서성대다가 열없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책상 모서리를 송끝으로 따라가다가 다시 전화기를 본다 검은 액정 화면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약속이 있고 시간을 어기지 않기 위해 이제는 씻어 야 하지만 전화가 오지 않는다 양치질하는 동안에도 전화가 오지 않는다 입가에 치약 거품을 묻힌 채 전화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샤워기를 틀기까지 또 몇 초간 기다린다 미지근한 기다림이 계속된다 수도꼭지를 돌리니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떨어지고 비누칠을 하기까지 몇 분간 나는 덩그러니 욕조에 서 있 었다 교통사고라도 난 걸까 노트북에 커피라도 쏟은 걸까 행인에게 갑작스럽게 폭행을 당한 건 아닐까 피가 흥건한 단도가.. 2022. 7. 25.
시클라멘 [송종규] 시클라멘 [송종규] 지난 봄 어느 날 내 미열의 이마를 짚어주던 그의 손에는 두근거리는 봄밤의 향기가 묻어 있었다 그의 순결을 믿었으므로 나는 쉽게 나의 상처를 꺼내들고 그의 순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봄이 지나가고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감기 앓는 내 이마를 짚어주는 그의 손에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봄밤의 향기가 묻어 있지만 이제는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다 손가락에 불을 지펴 두근거림만으로도 꽃이 되는 비밀을 보여주는 그에게 나의 상처는 얼마나 가볍고 오만한가 불현듯 다가서는 한 토막, 어린 날의 기억처럼 그는 왔다 그의 붉은 꽃 그늘이 거느리고 있는 뜨거운 말을 더듬거리며 누가 읽고 있다 말이 강물을 이룬다 한들, 어떻게 붉은 꽃 그늘의 비밀을 해독해 낼 수 있을 것인가 그 봄에는 아무도 꽃 피지 .. 2022. 7. 23.
눈을 뜰 수 있다면 [박은지] 눈을 뜰 수 있다면 [박은지] 활활 타오르는 불을 구경했다 저게 우리의 미래야 나는 거대한 캠프파이어 같다고 생각했지만 너의 눈동자를 오래 들여다보니 왠지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뜨겁고 빛나는 우리가 머물던 의자도 불타고 있을걸 의자 아래에선 잡초가 적당한 높이로 자라고 우리가 흘릴 아이스크림을 기대하며 발등을 오르던 개미 의자 옆에는 결말을 쌓아 만든 돌무더기가 있었다 돌무더기를 뒤덮은 나무 그림자도 뜨겁게 빛나고 있을까 밤새도록 타는 소리를 들었다 꿈에선 결말의 비밀이 불탔고 모든 이야기가 다시 끓기 시작했다 들끓는 꿈 새벽은 연기가 점령했다 아침 냄새와 저녁 냄새를 모두 불에 빼앗겼다 계곡을 따라 불이 사라진 자리를 걸었다 검은 하늘 아래 검은 재가 가득했다 모두 비슷한 색을 갖고 있었다 발이 묶인 .. 2022. 7. 22.
빛멍 [이혜미] 빛멍 [이혜미] 돌이켜보아도 무례한 빛이었다. 최선을 다해 빛에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길이었다. 응고되지 않는 말들, 왜 찬란한 자리마다 구석들이 생겨나는가. 너무 깊은 고백은 테두리가 불 안한 웅덩이를 남기고. 넘치는 빛들이 누르고 가는 진한 발자국 들을 따라. 황홀하게 굴절하는 눈길의 영토를 따라. 지나치게 아 름다운 일들을 공들여 겪으니 홀로 돋은 흑점의 시간이 길구나. 환한 것에도 상처 입는다. 빛날수록 깊숙이 찔릴 수 있다. 작은 반짝임에도 멍들어 무수한 윤곽과 반점을 얻을 때, 무심코 들이 닥친 휘황한 자리였다. 눈을 감아도 푸르게 떠오르는 잔영 속 이었다. - 빛의 자격을 얻어, 문학과지성사, 2021 * 얻어맞은 상처는 멍이 되겠지만 가끔 멍을 푸는 방법으로 멍때리기가 있다. 불을 .. 2022.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