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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잠 [진해령] 사막의 잠 [진해령] 발밑이 온통 모래구럭이었다 벌어먹는다는 게 사하라였고 자식을 기른다는게 모하비였고 고비였다 딘봉에 비린 물을 때려 넣고 허접한 소금 등짐을 지고 떠돌던 때 더 그악해지기 위해 모질게 마음을 분지르던 거기가 나미브였다 참을 수 없는 반감과 환각에 시달린 젊은 날 잠시 걸린 열병에 눈 멀었던 붉은 땅 와디 럼 껴안으면 더 깊숙이 찔러오던 가시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뜬 눈으로 견디던 다나킬의 밤 언제나 등 뒤를 조심했지만 출처 없는 소문이, 출구 없는 파국이 조간으로 배달되었다 잠들지 마라 칼라하리, 듣기엔 근사한 소프라노 가수의 이름 같지만 목이 말라 괴롭다는 사막의 이름 생은 그런 거다 듣던 것과는 다른 다가가 보면 이미 죽어있는 사내의 눈에 구더기가 끓고 있는. - 월간 '시.. 2022. 7. 1.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이은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이은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망루는 무너지고 꿈꾸지 않은 곳에서 흰구름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멀리서 가까이서 사람들이 죽었다 춥거나 뜨거운 곳에서 이름도 없는 방에서 나는 그늘지지 않을 기회를 잃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풍경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성급한 화해밖에 몰랐고 알 수 없는 눈빛만을 남기고 등을 보였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나라는 자신 스스로에게 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느냐며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 비굴한 거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여기저기서 위로라는 단어가 들려왔다 출발도 못했는데 쉬어 가라는 목소리처럼 나는 달콤한 제안을 아낌없이 받아들였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지나치게 우울했고 나는 지나치.. 2022. 7. 1.
새의 위치[김행숙] 새의 위치[김행숙] 날아오르는 새는 얼마나 무거운지. 어떤 무게가 중력을 거스르는 지. 우리는 가볍게 사랑하자. 기분이 좋아서 나는 너한테 오늘도 지고, 내일도 져야지.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겨울 코트엔 온통 깃발이 묻고. 공중에서 죽어가는 새는 중력을 거절하지 않네. 우리는 죽은 새처럼 말이 없네. 나는 너를 공기처럼 껴안아야지. 헐거워져서 팔이 빠지고, 헐거워 져서 다리가 빠져야지. 나는 나를 줄줄 흘리고 다녀야지. 나는 조심 같은 건 할 수 없고, 나는 노력 같은 건 할 수 없네. 오늘은 내내 어제 오전 같고. 어제 오 후 같고.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오늘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 러나 오늘은 발자국이 생기기에 얼마나 좋은 날인지. 사람들은 전부 발자국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네... 2022. 7. 1.
홍역 [이은규] 홍역 [이은규] 누군가 두고 간 가을 홍역처럼 붉다, 라는 문장을 썼다 지운다 무엇이든 늦된 아이 병(病)에는 누구보다 눈이 밝아 눈이 붉어지도록 밝아 왜 병은 저곳이 아닌 이곳에 도착했을까 답이 없는 질문과 질문이 없는 답을 떠올린다 안으로부터 차오르는 열매 나는 병력을 지우고 붉은 몸을 잘 표백시키는 사람들을 조금 부러워했나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조금 부러워했나 기다리지 않아도 돌아오는 절기 혼자 부르는 돌림노래에 공을 들이고 그것만은, 포기하지 않기 위해 손을 모을 뿐 저기 핑그르르 수면을 도는 단풍잎 같은 병을 다르게 앓지 못한 우리들은 왜 약속 없이 나누는 역병처럼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서만 생각했을까 붉어지는 열매 금세 핑 도는 울음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아닌 그래서 나는 오늘 질문.. 2022.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