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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유령들 [조온윤] 시월의 유령들 [조온윤] 알고 있나요? 이 도시의 밤거리에는 아직도 성냥을 파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제값보다 몇 배는 더 비싸게요 손댈 수 없는 추위 속을 핼로윈 유령처럼 돌아다니며 손바구니에 초콜릿 맛 동전을 가득 넣어줄 어른들의 등허리를 두드리고 있어요 무언갈 태워 담뱃불을 붙이던 시대는 지나갔나요? 그래요, 이제는 그들의 방문이 언짢은가요? 그래요, 간단해요, 고개를 조금만 움직이면 그만입니다 그들이 안 보이는 반대쪽으로 그들이 안 보이는 높다란 키로 겅중겅중 시력 속에서 흩어져버리면 간단합니다 핼로윈에 사탕을 못 받은 유령들은 사라지고 말 테죠 안녕, 또 올게, 열리지 않는 문짝 위에 섬뜩한 낙서를 하고 언젠가는 똑같이 열리지 않는 침묵이 되어 이 거리에 돌아오겠죠 알아요, 알고 있어요, 하.. 2021. 10. 31.
연기 내뿜는 아버지 [이승하] 연기 내뿜는 아버지 [이승하] 일회용 아닌 생이 어디 있으랴 인간은 한 생에 몇 개의 종이컵을 버릴까 칫솔 하나를 사 써도 포장은 쓰레기 칫솔도 몇 달 안으로 쓰레기가 된다 식물이 애써 만든 산소를 동물인 나 이산화탄소로 내뿜었지 원유를 정제하여 만든 휘발유를 인간인 나 운전하면서 배기가스로 내뿜었지 허공으로 사라져도 대기권 안쪽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아버지 저승에서 이승으로 방을 옮긴 아버지 - 승하야, 살짝 나가서 담배 좀 사 오너라 - 아버지 담배는 절대 안 된다고 하잖아요 - 마지막으로 한 대만 피우자 - 안 돼요, 그럼 또 중환자실로 옮겨야 돼요 - 딱 한대만 피우자 시원하게, 한 번은 내뿜고 싶어서일까 이라크에서 담배 물고 죽어간 부상병의 동영상 병원 침대에서 폐 앓으며 죽어가는 아버.. 2021. 10. 31.
꽃마리 [장승진] 꽃마리 [장승진] 너에게 다가간다는 건 나를 조금씩 버리는 일 아주 작아 하마터면 밟힐 뻔한 가냘픈 영혼 향해 숙여 엎드린다는 건 간절히 기도하는 일 마음에 새겨 넣기 위해 허리 뻐근해진 이름 가슴에 훅 안겨들던 조그만 얼굴 - 천상의 화원, 달아실, 2021 * 작아도 너무 작아서 꽃을 보려거든 쪼그려 앉아 고개 숙이고 보아야 한다. 연한 하늘색이라 눈에 빨리 드는 건 아니다. 꽃마리, 봄까치꽃과 비슷한 색이고 조금더 연약하게 생겼다고나 할까. 눈에 드는 순서로 보면 빨주노초파남보이니 눈에 잘 안띄는 색인데 게다가 작아서 눈에 금방 들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 알고나면 눈에 잘 띄긴 한다. 이름도 너무 귀엽지 않은가. 꽃마리라니! 2021. 10. 31.
가여운 거리 [허연] 가여운 거리 [허연] 베란다에 걸려있는 빨래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생은 잠시 초라해졌다가 다시 화색이 돌기도 한다 경멸할 것은 없다. 어차피 다 노래니까 나는 이 위험한 계보를 알고 있다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이 약기운에 지친 환자처럼 얌전해지는 밤을 알고 있다 서리 낀 창밖은 질문으로 가득하지만 여기선 답을 하지 않는다. 질문 속에 답이 있거나 혹은 답이 두렵기 때문이다. 도시의 동쪽에는 노숙인들이 낮 시간을 보낸 긴 의자들과 고장 난 그네가 있다 나중에 봄이 되었을 때 의자와 그네에는 새로운 색이 칠해져 있을 것이다. 겨울이 오기 전 거리가 파헤쳐지면 사람들은 비로소 도시를 이해한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끔 새들이 태어났다. 도시는 자꾸만 바람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고 나는 들려오는 모든 .. 2021. 10.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