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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이 된 밀감 [손한옥] 곶감이 된 밀감 [손한옥] 아버님 기일 진설을 둘러본다 어동육서 좌포우혜 홍동백서 맞고 조율시이 시에 딱 걸렸다 혼망한 물목들 곶감처럼 말라가고 홍시보다 무른 정성 송구하여 읍하는데 막내 시동생 일주향 맑은 음성 응무소주이생기심 나투며 8폭 금강경 병풍으로 나를 둘러 감싼다 - 밀감도 감입니다 형수님! - 얼음강을 건너온 미나리체, 달아실, 2021 * 우리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제사상에는 영 잼병이다. 가끔 처가에서 제사를 지낼 때 병풍은 쳐주지만 상에 놓는 법을 몰라 참견을 하지 않는다. 동쪽이면 어떻고 서쪽이면 어떠리. 맛있게만 드시고 가시면 될 것을! 사실 드시고 가는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제사 마치고 밥먹는 재미 말고는 세월이 흘러도 제사 지내는 법은 늘 서투르다. 밀감도.. 2021. 10. 29.
마리아를 위한 변명 - 시론 [우대식] 마리아를 위한 변명 - 시론 [우대식] 마리아 당신은 내 유일한 저쪽이다 모래바람이 당신의 한쪽 얼굴을 쓸고 갈 때 태양은 당신의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맑고 찬 우물에 충충히 번지는 양의 핏물처럼 광야의 밤이 찾아온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떠도는 밤이다 태초에 있었던 당신 마리아라고 부를 때마다 쌓여가는 그리움의 두께를 느낀다 가까스로 살아 당신을 배경으로 오래전 인화된 사진처럼 낡아간다는 사실은 어떤 위로와도 견줄 수 없다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있다는 사실도 적어둔다 마리아 서리 내리는 가을 새벽처럼 우리가 좀 더 추운 곳에서 종말을 맞이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물을 긷는 사내가 되어 어떤 골목길에서 당신을 만나는 꿈을 꾼다 조심스레 길을 비킨다 찰랑대는 물통에서 몇 방울의 맑은 물이 당신의 옷.. 2021. 10. 28.
뒷모습 [조경선] 뒷모습 [조경선] 누가 나를 자꾸 지켜봐요 그대가 떠오르는 것은 말의 여진뿐 절절한 기도는 앞만 생각해요 손에 쥐어진 대부분의 말은 한바탕 소란 뒤 달뜬 목소리로 나타나는 눈물주머니, 신기루의 소음들 나는 생방송이 없지만 언제든지 안녕하세요를 들어요 주말에 봄비가 내려요 월요일은 두꺼운 옷을 벗어던지고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문장은 때문에라는 문자로 가로막혀 있어요 나를 가르치는 습관은 튜닝을 몰라 삼거리를 만나면 정신이 혼미해져요 나의 발자국은 금지구역이 필요해요 조금만 더우면 양말을 벗어던져 술 먹는 날은 본능에 충실해요 누가 나를 자꾸 훔쳐봐요 유년으로 돌아가요 연애 따윈 접는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 나를 돌아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그게 문제야 지금이 좋아요 저렇게 목련꽃 터지는 날 - 개가 물.. 2021. 10. 28.
생활의 실패 [박용하] 생활의 실패 [박용하]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누구를 지배하지도 않는다 꿈결 같은 생활이 여기에 있다 강자한테 덤비고 약자한테 함부로 하지 않는다 꿈속 같은 생활이 여기에 있다 누구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꿈의 생활이 여기에 있다 이런 생활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고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오늘도 죽어가고 있다는 불변 앞에서 피는 돈다 소박한 생활 앞에서 내 피는 열렬하고 우상은 멀어지고 우애도 빛을 잃고 거창한 꿈 없이 나는 내 발 위에 서 있다 발 위를 가며 평범한 생활을 생활한다 (오죽했으면 그 사람은 평범이 그립다고 했을까) 사람들 만나 떠들고 술 마시는 게 점점 귀찮아진다 내가 하는 말이 귀찮아지듯이 그들이 하는 말이 귀찮아진다 내 부모형제가 귀찮아진다 같이 밥 먹는 게 귀찮아진다 그들이.. 2021. 10.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