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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신이 되는 날 [김선우] 작은 신이 되는 날 [김선우] ​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내가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당신을 향해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날 ​ 먼지 한점인 내가 먼지 한점인 당신을 위해 기꺼이 텅 비는 순간 ​ 한점 우주의 안쪽으로부터 바람이 일어 바깥이 탄생하는 순간의 기적 ​ 한 티끌이 손잡아 일으킨 한 티끌을 향해 살아줘서 고맙다, 숨결 불어넣는 풍경을 보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날 -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2021 * 우주로 치자면 인간은 한 점 먼지같은 존재. 하지만 한 점이 한 점을 만나 서로 숨결을 불어넣는 수고를 해준다면 그것이 곧 사랑이고 숭고한 기적일 게다. 인간의 마음에는 신성이라는 게 있어 때로는 누군가에게 신이 되기도 한다. 두손 모아 '감사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신에.. 2021. 11. 15.
카푸치노 [최금진] 카푸치노 [최금진] ​ ​ 거품에도 맛이 있다는 걸 알아낸 건 수도원의 수사들일까 웃음이 죄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듯이 굳게 턱뼈를 다물고 나면, 어디든 걸어갈 용기가 생기곤 했지 그곳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더라도 공기처럼 너의 방으로 스며들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곤 했지 저녁 들판을 태워 한 줌 재로 만드는 상상 속에서 종이에 편지를 쓰곤 했지 거짓말, 거짓말, 이라고 쓴 긴급 전보를 받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나무 냄새가 나는 상자에 들어가 커피콩처럼 웅크려도 좋았어 세계는 손잡이가 없어서 누구도 열어 볼 수 없고 마른 빵을 먹는 일에도 저토록 진지한 몰입이 필요한 법이어서 나는 자꾸 눈물이 났지, 종이를 부드럽게 구겨서 닦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카푸치노를 마시고 싶어 얼룩무늬 젖소가 제 커다란.. 2021. 11. 10.
집 없는 새 [이명수] 집 없는 새 [이명수] 밤새 추위에 떨며 내일은 집을 지어야지, 동이 트면 간밤 일은 까맣게 잊고 햇살에 따라 신나게 놀다가 평생 집을 짓지 못한 새 夜鳴朝笑鳥* 그 새를 찾아 히말라야 설산을 헤맸다 그런 새는 없다 히말라야에서 보지 못한 새를 서해 이작도에서 보았다 25억 1천만 년 된 암석 그 위에 손을 얹자 검은 바위 속에서 새 한 마리가 솟아올라 노을 지는 모래섬 풀등**으로 날아간다 사리 때는 울고 조금 때는 웃는 새 25억 1천만 년 동안 울고 웃었을 滿鳴干笑鳥 히말라야 새와 동족이다 나도 그들과 동족이 아닌가 * 불교설화 속 상상의 새. 후세사람들이 「밤에 울고 아침에 웃는다」는 뜻을 새겨 우화적으로 지은 이름. ** 대이작도 앞바다. 썰물에 드러나고 밀물때는 바닷물에 잠기는 거대한 모래톱의.. 2021. 11. 10.
이발소라는 곳 [심재휘] 이발소라는 곳 [심재휘] 불쑥 오래된 이발소에 가고 싶다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한 곳 해질 무렵 집에도 가기 싫을 때 뜻밖의 이발소를 마음 속에 짓고 하나밖에 없는 의자에 앉으면 나는 너무 오랫동안 허락도 없이 이발소를 다녔구나 오랫동안 거울 속에 건네다 주었던 표정들을 돌려받고 싶다 그리고 후드득 떨어지는 머리카락들을 보며 스르륵 잠이 들고 싶다 머리카락 같은 속마음들을 들키지 않고 그 가늘게 슬픈 것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툭 가볍게 떨어지는 머리칼같이 빙긋 웃으며 긴 잠을 자고 싶다 - 시안, 이천십이년 가을호 * 남자는 이발소, 여자는 미용실이라는 틀에 갇혀 있기도 했고 미용실의 파마냄새 때문에라도 미용실을 간 적이 없다. 이발소는 대략 머리칼 자르는데 한시간이 걸린다. 무쟈게 인내심을 가지지 않으면.. 2021.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