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감상276

시는, 시를 견디라며 [박완호] 시는, 시를 견디라며 [박완호] 시는, 시를 견디라고 내게 온다. 어제의 나를 견디고 여태 짊어지고 있던 불행을 더 끌어안으라고 이런 개새끼, 귀가 다 헐도록 들어온 수모와 욕설까지 한꺼번에 나를 찾는다. 그날, 비 내리는 무심천 울먹이는 물그림자 툭하면 꺼지려 들던 불꽃의 어린 심지 앙다문 입술 사이 실금처럼 일그러지던 글자들. 시는 어떻게든 오늘을 버텨내라며 어제처럼 나를 일으켜 세운다. 온 힘을 다해 지평선을 밀어버리려는 사내*를 보라며 경계에 설 때마다 머뭇거리는 나를 싸움판으로 떠밀어댄다. * 유홍준 詩, 「지평선」 - 문득 세상 전부가 되는 누군가처럼, 북인, 2022 * 詩를 한자로 풀이하자면 사원에 가서 말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원에는 절대자, 신이 있고 인간은 그 앞에 서서 자기.. 2022. 6. 18.
흘려 쓰다 [박완호] 흘려 쓰다 [박완호] 끝과 처음사이에서 자주 길을 잃는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다 입구 같고 출구 같지만 어느 것도 아니었던 항문과 입이 한 덩어리인 길들의 변덕 또는 능청. 해면에 흘려 쓴 글씨처럼 일그러지는 서로 겹치며 비껴간 발자국들. 마지막이라고 느낀 자리가 처음 그곳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길에서 막 나왔는데 또 길 위에 서 있는 나. 어디에나 서 있는 내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 문득 세상 전부가 되는 누군가처럼, 북인, 2022 * 끝과 처음 사이에서 방황한다는 건 끝까지 가보았는데 길을 잃었다고 깨달은 것이다. 처음의 초심을 처음부터 잃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시종일관이란 말도 있고 철두철미라는 말도 있다. 그러기가 쉽지 않기에 사자성어로 초심을 지키게 하는 것일 게다. 세상의 .. 2022. 6. 16.
금지된 삶 [김호성] 금지된 삶 [김호성] 문고리를 돌린다 화분에는 물이 말랐고 남은 이파리는 밖을 향해 눕는데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가 같이 죽을 사람 하나 없는 나는 미궁으로 간다 식은 난로 아래 잿더미는 본 적 없는 그림자를 화사하게 치장한다 간절하고 용서받고픈 자들의 적 그 앞에서 나는 절대 지치지 않는다 칼을 들어 고개 숙인 영혼들의 어깨를 찌르면 그들은 몇 가지 제목을 발설하고 나를 추종하게 된다 원망하는 일은 한여름 도시처럼 질겨 폐가 망가진 시인도 담요를 뒤집어쓰고 웅크린다 책장이 솟아오르고 수돗물이 쏟아지는 귀 아픈 소리도 흥얼거리는 자장가로 변한다 살인자의 왕인 그림자에게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거울을 간직하고 있기에 깨어나면서 평온을 느끼지 못하는 물건이 더 나은 육체를 바라는 일이 정말 부질없는지를.. 2022. 6. 15.
덮어놓고 웃었다 [채수옥] 덮어놓고 웃었다 [채수옥] 보도블록으로 덮인 길의 중간이 끊겼다 공사하다 남 은 것들을 검은색 천막으로 덮어 놓고 통행금지 푯말을 세워 놓았다 무엇이 덮여 있는지 모른 채 덮어놓고 돌 아갔다 덮어놓고 길을 걷고 덮어놓고 밥을 먹었다 덮어 놓고 오열하고 덮어놓고 섹스를 했다 너는 그것을 덮어 놓고 믿었다 물어볼 용기가 없을 때 덮기로 했다 덮어놓 고 관광버스에 올라 덮인 사람들과 관광을 떠났다 문제 가 발생하기 전에 먼저 덮었다 시간은 덮어놓고 흘러가 고 나는 덮어놓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다 덮어놓고 저 녁이 왔고 우리는 덮어놓고 이별을 했다 덮는 것이 상책 이라고 생각했을 때 덮어야 하는 것들은 더 많이 생겨났 다 보도블럭을 덮었던 검은 천막은 공중에서부터 땅까 지 그 너머의 것들을 덮고 있었다 검은 천.. 2022.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