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276 포장마차 국숫집 주인의 셈법 [배한봉] 포장마차 국숫집 주인의 셈법 [배한봉] 바람 몹시 찬 밤에 포장마차 국숫집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예닐곱쯤 되는 딸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늙수그레한 주인이 한 그릇 국수를 내왔는데 넘칠 듯 수북하다. 아이가 배불리 먹고 젓가락을 놓자 남자는 허겁지겁 남은 면발과 주인이 덤으로 얹어준 국수까지 국물도 남김없이 시원하게 먹는다. 기왕 선심 쓸 일이면 두 그릇을 내놓지 왜 한 그릇이냐 묻자 주인은,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 사람이 한 그릇 값 내고 한 그릇은 얻어먹는 것이 되니 그럴 수야 없지 않느냐 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 포장마차 주인의 셈법이 좋아 나는 한참이나 푸른 달을 보며 웃는다. 바람은 몹시 차지만 하나도 춥지 않다. - 육탁, 여우난골, 2022 * 열 번 온 손님에게 국수 한 .. 2022. 6. 13. 가위바위보 [김승] 가위바위보 [김승] 이긴 사람이 한 잎씩 머리부터 떼어 내기로 해 그 다음은 왼쪽 팔과 오른쪽 팔을 그리고 양쪽 갈비뼈 두 다리마저 다 떼어내고 척추뼈만 남긴 사람이 이긴 걸로 하자 먼저 버리는 사람이 먼저 떠날 수 있는 세상 바람에 흩날리면서 바닥으로 떨어질 때의 황홀함은 이긴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 이파리를 다 떼어낼 때까지 아픔도 있겠지만 바둥바둥 붙어 있어 보아야 한나절인데 매미가 울기 시작하고 아지랑이는 고물고물 사다리 없이도 하늘을 기어오르는데 물 한 모금 없이 마른하늘을 쳐다보며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건 비참한 일이지 우리 그냥 하나씩 하나씩 가벼워지자 먼저 져 주 면 서 - 물의 가시에 찔리다, 실천, 2021 * 인간은 게임을 즐기는 동물이다. 물론 사자나 표범도 새끼들끼리 물고 뜯고.. 2022. 6. 12. 튤립 [김혜영] 튤립 [김혜영] 공원은 기하학이다 두 손은 다정하고 공사장 인부의 안전모가 빛나고 먼 네덜란드를 떠나온 튤립 구근은 부산 시민공원 입구에 피어나 나비 떼처럼 흔들린다 카메라 렌즈에 비친 노란 튤립 사이로 수녀의 검정 치마가 흔들린다 은은히 불어오는 예감에 입술은 공기처럼 부풀어 오르고 튤립 봉오리는 미풍에 고개를 흔든다 벤치에 앉은 노인은 아내의 손을 쓰다듬는다 감미로운 속삭임이 번지는 저녁 곁에 가만히 다가온 몸짓 누구일까, 계절을 기억하는 나선형 우주는 음악을 켜고 우리가 사랑한 붉은 튤립이 흔들린다, 기하학적으로 - 다정한 사물들, 여우난골, 2021 * 부산 시민공원은 기하학적으로 잘 지어진 공원이다. 이런 공원에 머나먼 나라 네덜란드에서 구근을 사다가 심은 튤립은 기하학적인 감정을 준다. 꽃을 .. 2022. 6. 11. 중심 잡기 [조온윤] 중심 잡기 [조온윤] 천사는 언제나 맨발이라서 젖은 땅에는 함부로 발을 딛지 않는다 추운 겨울에는 특히 더 그렇게 믿었던 나는 찬 계단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언 땅 위를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골몰했다 매일 빠짐없이 햇볕 쬐기 근면하고 성실하기 버스에 승차할 땐 기사님께 인사를 하고 걸을 땐 벨을 누르지 않아도 열리는 마음이 되며 도무지 인간적이지 않은 감정으로 인간을 위할 줄도 아는 것 혹은 자기 희생 거기까지 가닿을 순 없더라도 내가 믿는 신이 넘어지는 나를 붙잡아줄 것처럼 눈 감고 길 걸어보기 헛디디게 되더라도 누구의 탓이라고도 생각 않기······ 그런데 새벽에 비가 왔었나요? 눈을 떠보니 곁에는 낯선 사람들이 있고 겨드랑이가 따뜻했던 이유는 그들의 손이 거기 있었기 때문 나는 .. 2022. 6. 10. 이전 1 ··· 6 7 8 9 10 11 12 ··· 6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