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276 저수지 [박완호] 저수지 [박완호] 저수지는 커다란 구멍으로 구름을 삼켜댔다. 저수지가 입을 벌렸다 다물 때마다 수면에 맺힌 그림자들이 한꺼번 에 지워졌다. 구름에 가려 있던 새들까지 삼켜버린 걸까? 허공을 흔들어대던 새 울음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을 때 도 있었다. 날개 없는 것들은 잔물결을 타고 물가를 끊임 없이 떠돌았다. 모로 드러누운 산 그림자를 삼키다 말고 게 워내는 물빛이 역류성식도염처럼 검푸르게 반짝였다. 저 녁이면 고무 탄내를 풍기며 비포장길을 돌아가는 바퀴 소 리가 산 그림자 속을 파고들었다. 젊은 부부가 나란히 누운 산등성이 쪽으로 부는 바람은 자주 노을빛을 띠었지만 깊 은 밤 저수지를 서성이는 사람의 속내까지는 물들이지 못 했다. 물 위에 뜬 그림자들을 삼켜댈수록 저수지 가를 떠도 는 그림자들은 점점 .. 2022. 6. 9. 빈 손 [최문자] 빈 손 [최문자] 하나님은 모처럼 옆에 있는데 나는 둥근 무릎이 없고 긴 머리털이 없고 향유가 동이 난 여자 마리아가 꿈처럼 옥합을 깨뜨릴 때 나는 1데나리온*을 위해 강의하러 갔지 주머니 단팥빵은 얼고 눈보라가 쏟아졌다 텅 빈 겨울 아무나 그런 눈보라 꿈을 꾸나 나의 기름은 꿈이 없나 봐 나의 빵은 언제 향유가 되나 저기 지나가는 여자들 모두 향유가 넘쳐 여름에 앞치마 가득 꺾어 둔 나드 꽃 꽃이 넘쳐 마리아는 데나리온을 셀 줄 몰라. 300데나리온을 그냥 흘려보내. 흐르다 옥합을 깨뜨리고 다 흐르고 나니 나드 꽃은 눈물이 되었지. 흐를 수 없어 빈 손 문지르며 저기 길에 서 있는 여자 함박눈이 쏟아졌지 빵은 주머니에서 고드름처럼 얼어붙고 자꾸 목이 메었다 향유보다 눈물이 먼저네 나는 * 마리아가 예수.. 2022. 6. 9.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요 [김안녕]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요 [김안녕] 아부지 이제 아무 전화나 받고 공짜로 뭘 준다고 해도 듣지 마세요 예, 아부지? 이거 이 년 약정이니까 해지 못 해요 이 년 동안은 무조건 이거 쓰셔야 해요 안 그러면 또 위약금 물어야 돼요 ―그랴 내가 그날 뭐에 씌어서 그런데 내가 이 년은 살 수 있을랑가 모르것다 그 대목에 왜 웃음이 났을까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책 제목처럼 죽고 싶지만 새 핸드폰은 갖고 싶은 마음 그 마음 때문에 실실 웃음이 난다 농담과 진담을 구별할 수 없는 날들 어제 놓친 버스를 오늘 또 놓친다 - 사랑의 근력, 걷는 사람, 2021 * 어느 가문에서 가훈을 만들려고 좋은 말들을 죄다 끌어 모아 빼고 빼고 빼다가 마지막에 남은 게 ‘세상에 공짜는 없다’였다고 한다. 공짜면 양잿물도 .. 2022. 6. 7. 밥값 [문태준] 밥값 [문태준] 허름한 식당에서 국밥을 한술 막 뜨고 있을 때 그이가 들 어섰다 나는 그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수레에 빈 병과 폐지 등속을 싣고 절룩거리며 오는 그이를 늦은 밤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이는 식당 한편 벽에 걸린 달력의 28일을 오른손으로 연거푸 짚어 보였다 무슨 말인가를 크게 했으나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 었다 식당의 여주인은 조금도 언짢아하는 기색이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짧은 시간 후에 그이의 앞에 따뜻한 밥상이 왔다 -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 * 빈 병과 폐지를 모아 팔아봐야 몇천원일텐데 사실 한끼를 사먹기도 버거운 편이다. 28일엔 한달치 수고비를 받는 날인가 싶다. 자신있게 큰 소리 치는 건 28일엔 외상값을 갚겠다는 뜻이겠다. 여주인이 긍정적으로 끄.. 2022. 6. 6.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6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