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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또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 2022. 4. 20.
터치 [손택수] 터치 [손택수] 건반은 누르는 것이 아니다 건반위의 공기를 들어올리듯이 얼른, 뗄 줄 아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터치, 안장을 눌렀다가 떼는 식으로 내 자전거 바퀴도 돌아간다 대지와 하늘이 챙, 은빛 쇳소리를 내는 어느 구비에는 연못을 치는 빗방울의 연타음이 들려오고 두두두두 뭉친 겨울 벌판을 안마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공기를 야구공처럼 때려대는 스윙, 스윙, 웅크린 꽃망울에 가닿는 봄 햇살의 터치, 터치, 타자기처럼 두드려대는 한 점 한 점 속에서 온 우주가 팍 터져버릴 때까지 닿는 순간 멀어질 줄 아는 운행 -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2020 * 존 레논이 부른 LOVE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Love is touch, Touch is love. 터치한 손을 놓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 2022. 4. 20.
냉이꽃 [손택수] 냉이꽃 [손택수] 냉이꽃 뒤엔 냉이열매가 보인다 작은 하트 모양이다 이걸 쉰 해 만에 알다니 봄날 냉이무침이나 냉잇국만 먹을 줄 알던 나, 잘 익은 열매 속 씨앗은 흔들면 간지러운 옹알이가 들려온다 어딜 그렇게 쏘다니다 이제사 돌아왔니 아기와 어머니가 눈을 맞추듯이 서로 보는 일 하나로 가지 못할 곳이 없는 봄날 쉰내 나는 쉰에도 여지는 있다 나는 훗날 냉이보다 더 낮아져서, 냉이뿌리 아래로 내려가서 키 작은 냉이를 무등이라도 태우듯 들어올릴 수 있을까 그때, 봄은 오고 또 와도 새 봄이겠다 -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2020 * 시인만 쉰에 안건 아니다. 나도 쉰에야 알았던 것 같다. 서울에서 자라서 냉이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저 냉잇국이나 먹을 줄 알았던... 지금은 한눈에 들어오는 냉이꽃.. 2022. 4. 20.
슬픔의 바깥 [신철규]낮달 슬픔의 바깥 [신철규] 낮달 보라색 보자기를 든 여인이 사거리에 서 있다 꼼꼼히 싸 맨 보자기 안에는 쟁반에 담긴 커피포트와 찻잔 두 개가 있 을 것이다 보자기 매듭이 토끼 귀처럼 쫑긋 솟아 있다 그녀 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다 정면을 바라보는 것도 바닥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것인지 자신을 힐 끔거리며 지나치는 행인들을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 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귀밑머리를 가만히 쓸어 올려 귀 뒤 로 넘긴다 오래전 소중한 사람을 배웅하고 난 뒤 한참을 돌 아서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쪽 뺨이 파인 낮달이 허공에 떠 있다 그녀 앞 횡단보도가 한없이 펼 쳐진 계단처럼 누워 있다 멀리서 불법 유턴을 하고 쏜살같 이 달려온 파란색 소형 승합차가 멈춘다 그녀는 그제.. 2022. 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