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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드 1 [신미균] 해피 엔드 1 [신미균] 외딴 풀밭 위에 나무 빨래판 하나 누워있습니다 우툴두툴한 돌기가 다 사라져 밋밋합니다 귀퉁이도 많이 닳아 군데군데 떨어져나갔습니다 더 이상 물속에서 퉁퉁 붇거나 방망이로 두들겨 맞을 일은 없습니다 폭신폭신한 풀이 편안하게 받쳐주고 있습니다 나비 한 마리 빨래판 끝에 앉아 살살 춤을 춥니다 햇볕은 따뜻하고 하늘은 푸릅니다 - 문학청춘 21년 겨울호/ 시인시대 2022년 봄호 * 시골에 가면 아직도 나무 빨래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요즘 도시에서는 쓸 일이 없는 나무 빨래판. 본업은 세탁을 위해 비누가 묻혀진 옷에 때를 빼라고 돌기도 주어 박빡 문때게 하였지만 부업으로는 방망이질을 당해 주는 거였는데 사실은 그게 본업에 더 맞을지도 모른다. 빨래하는 아낙은 시어머니 잔소리가 싫어서 멀.. 2022. 3. 29.
낮달을 볼 때마다 [문태준] 낮달을 볼 때마다 [문태준] 가난한 식구 밥 해 먹는 솥에 빈 솥에 아무도 없는 대낮에 큰어머니가 빈 솥 한복판에 가만하게 내려놓고 간 한대접의 밥 -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 * 햇볕은 공평하게 모든 동물과 식물 그리고 사물에게 사랑을 준다. 하지만 달빛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아무도 모르라고 슬그머니 사랑을 준다. 더구나 낮달의 사랑은 더 그렇다. 한대접의 밥이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가난한 식구에게는 크낙한 사랑이다. 해마다 연말이면 불우이웃 도우라고 돈이나 쌀을 몰래 동사무소에 놓고 가는 이가 있다. 매일 배고픈 이들에게 밥 굶지말라고 따뜻한 국밥을 나누어주는 종교단체도 있다. 이 모든게 낮달처럼 가만히 나누는 사랑이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크낙한 사랑이다. 두 손 모아 낮달을 .. 2022. 3. 28.
증후군 [조온윤] 증후군 [조온윤] 같은 공간에 사니까 자꾸 숨이 섞이잖아 이 방에서는 말을 아껴야 한다 의자가 놀라 넘어지지 않도록 그 위에서 빛이 새는 천장을 고치는 이가 내려오지 않도록 스위치를 내린 뒷모습에서 소리가 들려도 못 들은 체한다 서로가 입 댄 컵으로는 물을 마시지 않는 우리 침이 섞이니까 싸우지 않는다 피가 섞일까봐 그거 알아? 너랑 있으면 창문 밖만 상상하게 돼 숨이 자꾸 섞이니까 이렇게 아무 말도 않고 나란히 앉아 있으면 너는 열리지 않는 밀실 같으니까 희박해지는 공기를 나눠 마시면서 우리는 서로의 등에 기대어 심장과 심장이 나누는 타전을 훔쳐 읽는다 우리가 같은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 사랑스러워 숨을 참는다 가라앉는다 이름이 섞일까봐 우리는 부르지 않는다 - 햇볕 쬐기, 창비, 20.. 2022. 3. 27.
눈이 멀다 [정진혁] 눈이 멀다 [정진혁] 너에게 가닿지 못한 이야기는 다 멀었다 눈에 빠져 죽었다 침묵은 보이지 않는 눈의 언저리를 한 바퀴 돌아갔다 바깥이 되었다 눈이 멀어서 밥이 멀고 내가 멀어서 그림자가 멀었다 어떤 눈이 나를 송두리째 담아갔다 문득 문이 열리고 306동 불이 켜지고 모퉁이 앵두나무에 앵두가 익어 갔다 세상은 공중인데 내 손은 사무적이었다 몇 발자국 세다 보면 길은 끊어지고 손끝에 닿는 대로 기억이 왔다 눈이 고요하였다 끝이 넓었다 나는 고요를 떠다가 손을 씻었다 아카시아 향기 같은 것이 종일 흔들렸다 마음 하나가 눈언저리에 오래 있다 사라졌다 누가 먼눈을 들여다보랴 눈은 멀리서 볼 수 없던 것을 보고 있다 먼 오후가 가득하였다 아무리 멀어도 더 멀지는 않았다 -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 20.. 2022. 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