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278

The Sixth Sense [신미균] The Sixth Sense [신미균] 구름을 시켜 먹는데 엄마가 오빠 접시에는 세 조각 내 접시에는 한 조각만 준다 화가 나서 먹지 않고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아무도 나한테 신경 쓰지 않고 웃으며 맛있게 먹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아작 피클 씹는 소리랑 콜라 따르는 소리도 들린다 조금 있다가 오빠가 트림을 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 엄마가 그릇 치우는 소리 아빠가 베란다 문 여닫는 소리 오십여 년 전 그 소리들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지금도 그때처럼 나 빼놓고 자기들끼리 하늘에서 맛있게 놀면서 내가 불러온 구름을 조각내서 먹고 있다 -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파란, 2020 * 형제든 남매든 자라면서 공평하지 않았던 일은 오래 기억에 남아있고 마음 속에 담아둔다. 어느날 갑자기 불만스러운.. 2022. 3. 10.
시간은 늘 나와 함께 가네 [이승하] 시간은 늘 나와 함께 가네 [이승하] 1 시간은 나를 아프게 할 것이니 때가 되면 아파하자 시간은 나를 병들게 할 것이니 때가 되면 병들자 때가 되면 임종의 순간을 기다리자 유기체로서의 마지막 순간을. 2 내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 이 지구상 수많은 생명체는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을 테지 있을 테지 생명을 준비하려 막 회임하는 여인과 생명을 완성하려 막 진통하는 여인도 내 고고의 울음을 터뜨린 그 시간에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거나 막 숨을 거둔 지구상 수많은 생명체들아 죽을 수 있어 너희들과 나는 동격이다 3 1960년 4월 18일이었지요 저는 어머니와 힘을 합쳐 사력을 다 했지요 경북 의성군 안계면 그 시골 병원에서 어머니는 자궁에서 저를 내보내려고 위험할 정도로 하혈을 하고 저는 밝은 세상으로 나오려고.. 2022. 3. 10.
회양목 꽃을 만난 밤 [유승도] 회양목 꽃을 만난 밤 [유승도] 삐― 삐― 골짜기 쪽에서 우는 소리에 비― 비― 등성이 쪽에서 화답하는 소리에 얹혀서 들려오는 물소리 산 아래 마을의 닭 울음소리 그런데 흐흠, 달큰한 향내 또한 실려온다 향이 번져 오는 곳을 손전등으로 비추니 잎 사이사이에 잎보다는 좀 옅은 색으로 드러나지 않게 회양목 꽃이 피었다 낮에도 보지 못하다가 어둠이 짙어져서야 보았으니 오늘은 호랑지빠귀 붉은 소리에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겠다 - 사람도 흐른다, 달을 쏘다, 2020 * 회양목은 화단의 경계로 많이 심는 것인데 사람들은 꽃이 핀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꽃이라기보다는 잎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봄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어서 회양목꽃이 피면 벌들이 겨울잠에서 화들짝 놀라 깨어나고 미친듯이 꽃.. 2022. 3. 10.
심리적 참전 [권현형] 심리적 참전 [권현형] 도화지는 마음을 좀처럼 열지 않는다 무거운 잠수종(潛水鐘) 눈꺼풀을 열기 위해 기다린다 상처 주지 않고 공격하지 않고 그동안 흰 도화지 속엔 함박눈이 내리고 갇혀 있던 조랑말들이 신나게 돌아다닌다 바람을 넣은 빈대떡, 차가운 유리컵, 할아버지가 끼던 돋보기의 쓸쓸함이 가슴께로 천천히 머리를 기대온다 그가 입고 있던 티셔츠의 파랑이 도화지에 스며든다 그림 속 사람들은 귀가 크다 도화지의 말을 듣기 위해 1987년생 화가 김태호의 귀는 보리처럼 자란다 느리게 가까스로 고백한 도화지의 속말을 아끼지만 다시 파란 물감 속에 보석을 파묻는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도화지와 태호는 서로의 고통에 참전º하고 있다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지만 너무 느려서 태호는 도화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º 심리학자.. 2022. 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