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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는 바람은 [양균원] 오늘 부는 바람은 [양균원] 기억하지 않는다 출발을 기다리지 않고 도착을 서두르지 않는다 지나간 역은 모두 그라운드 제로 주인도 없고 객도 없다 그러니 꽃도 없고 짐승도 없는 빈터 난, 3B에 앉아 허용된 넓이로 어깨를 편다 21세기 축지법은 생략에 의존한다 접속사 접고 말줄임표 줄이고 아무 때나 끼어드는 여백, 더 이상 지나치는 게 없으므로 정지다 마침표 없는 정지는 곧바로 허공 푸른 여백에 눈으로 쓰는 것은 날아가, 지워져 다음, 다음, 다시 다음이 오면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닌 순간이 오고 또 간다 시간은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격하여 이동한다 오늘이 너무 빠르게 시작하고 또 끝나서 내일은 바닥난 우물이다 오늘을 따라잡을 수 없는 어제가 있다 채우고 다시 비우는 자리에는 기억이 머물 수 없다.. 2022. 3. 21.
개가 사라진 쪽 [고영민] 개가 사라진 쪽 [고영민]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 불붙은 개는 저쪽에서 달려올 테지 댓잎이 나오는 지금 쯤 어린 장어는 강에 오르고 열 세 명이나 들어가던 늙은 팽나무엔 연초록 새잎이 돋고 발목에 가락지를 채워 보낸 새는 다시 돌아오고 누가 개에게 불을 붙였나 달려도 달려도 불은 떨어지지 않고 개는 무작정 또, 달리고 나는 언제부터 지루해졌을까 차량정비소로 뛰어 든 개는 결국 건물 한 동을 홀라당 다 태울 텐데 그 사이 봄은 여름에게, 저녁은 밤에게 몸을 내어주고 개가 전속력으로 개로부터 빠져나가는 저녁 아무리 도망쳐도 너를 위한 몸은 없다고 모든 그림자는 가장 길게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는데 나는 우두커니 개가 사라진 쪽을 - 시와편견, 실천, 2021가을호 * 국민학교 다닐 때, 집에서는 개를 키.. 2022. 3. 21.
화암사를 찾아서 [복효근] 화암사를 찾아서 [복효근] 나는 지금 화암사에 가지 않는다네 애초에 산새 몇 마리 구름 몇 조각 바람 한 줄기만이 화암사 길 알았지 애면글면 세상일 힘이 부쳐 넘어지듯 헛디딘 발길을 안아주던 화장끼 없이 곱게 삭은 여자, 백일홍 몇 가지 드리우고 해종일 눈시울 닦아주던 여자 같은 화암사 아무도 그 길 모르라고 이정표를 몰래 꺾어놓고 싶네 화암사 길 모른다네 바람이나 구름이나 산새만이 아는 길 누군가 또 지친 발길 헛디뎌 찾기까지는 화암사는 없다네 나 오늘도 화암사엘 가지 않네 -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달아실, 2017 * 천안에서 고개를 넘어 진천에 들어서면 좌측으로 보탑사 가는 길이 있다. 십여년전부터 자주 가던 절인데 꼬불탕꼬불탕 차를 끌고 가면 좁다란 길에서 마주오는 차와 간신히 비켜가면서 .. 2022. 3. 17.
선암사에서 [곽효환] 선암사에서 [곽효환] 길고 깊었던 겨울의 끝이 아련하거든 꽁꽁 얼었던 개울도 조금씩 녹아 붉은 낙엽 실은 눈석임물 흐르거든 남도 선암사에 가셔야 합니다 자욱한 안개 갈대밭도 순천만도 다 삼킬 듯한 겨울도 봄도 아닌 그 사이 어느 날 마른기침을 토해내는 오래된 산사 무심히 무리 지어 있는 편백나무숲 그 고요 그 침묵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지난 가을 끝자락 금목서 향기 다 잊히기 전에 무우전 담벼락에 고매화 나른하게 피기 전에 조계산 굴목재에 연초록 오르기 전에 젖은 나무연기 잦아드는 저물녘 고즈넉한 침묵을 그 쓸쓸함을 밟으시려거든 이곳에 오셔야 합니다 천년 절집의 들머리에서부터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밀고 올라오는 그렁그렁한 숨소리, 말간 민얼굴 당신 닮은 계절이 그곳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다시 나.. 2022. 3.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