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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늄 [이규리] 제라늄 [이규리] 안에서는 밖을 생각하고 밖에서는 먼 곳을 더듬고 있으니 나는 당신을 모르는 게 맞습니다 비 맞으면서 아이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어요 약속이라고,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물은 비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나 봐요 그런 은유라면 나는 당신을 몰랐다는 게 맞습니다 모르는 쪽으로 맘껏 가던 것들 밖이라는 원망 밖이라는 새소리 밖이라는 아집 밖이라는 강물 조금 먼저 당신을 놓아주었다면 덜 창피했을까요 비참의 자리에 대신 꽃을 둡니다 제라늄이 창가를 만들었다는 거 창가는 이유가 놓이는 곳이라는 거 말 안 해도 지키는 걸 약속이라 하지요 늦었지만 저녁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으니 저녁에게 이르도록 하겠어요 여름, 비, 안개, 살 냄새 화분을 들이며 덧문을 닫는 시간에 잠시 당신을 생각합니다 흔들림.. 2022. 1. 22.
맹꽁이 [신미균] 맹꽁이 [신미균] 사람들은 자기들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우리를 맹꽁이라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 말을 알아들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들끼리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들 말만 있으면 되니까요. 사람들이 보면 우리가 답답하겠지만 우리들은 사람들이 답답해요 우리들은 맹 아니면 꽁이라는 소리만 내도 서로의 마음을 다 알 수 있는데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 많은 말들이 필요한지 정말 모르겠다니까요.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 많은 말들이 필요한지 정말 모르겠다니까요.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 시작, 2003 * 어젯밤 시사랑회원들간에 회자되었던 이 시는 한 방송국 뉴스시간에 방영되었다고 한다. 시인의 눈으로 보는 것과 일반인들이 보는 것과 특정인들이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시이다. 아마도 정치.. 2022. 1. 22.
도토리 [허림] 도토리 [허림] 참나무 꽃을 본 적 없다니까 촌놈이 그것도 못 봤냐 그러면서 도토리를 줍냐 정말 참나무는 꽃을 피우기나 하는 걸까 참나무 꽃을 꽃으로 보지 않은 그야말로 꽃을 꽃으로 보지 않은 탓이다 누가 꽃을 정의하였나 분명, 피고 지는 참나무 꽃 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편협한 고집들 세상의 꽃은 허울과 허물을 쓰거나 화장을 하고 밤의 조명 아래서 유혹하는 수천수만 빛의 광란이기도 한 꽃에 대한 오만과 편견이 꽃으로 피었으니 나도 꽃이다 꽃이면서 꽃인 척 참나무는 참회록 한 줄 쓴 적 없으나 어두운 지붕 위 툭 툭툭 선잠마저 깨우는 가을밤 내 생의 저쪽에서는 도토리 주워놔 묵 쑤어 먹자 문자가 날아오고 있다 - 누구도 모르는 저쪽, 달아실, 2020 * 도토리 열매가 꽃없이 필리가 만무한데 참나무 꽃을.. 2022. 1. 22.
저녁이 와서 당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권현형] 저녁이 와서 당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권현형] 종소리는 잘 빠져들게 되는 음악 받지 못한 편지의 아타까운 말줄임표 저녁과 저녁 사이 성북구의 성당 앞을 지나가다가 운 좋게 종소리를 들었다 요사이 쌓인 죄가 녹아 없어지는 순간 흰 눈가루를 타고 어깨에 내려앉는 종소리와 함께 가까이 있는 심장과 함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나의 죄를 내가 용서해도 된다면 지금 생각나는 사람을 맘껏 생각할 것이다 아직 쫓기는 꿈을 꾸는 것은 수렵의 본능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따뜻함을 믿는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셔도 어머니 역할을 해주신다는 믿음을 가엾은 인류는 여전히 갖고 있다 백오십 년된 식물 채집 표본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오늘의 할 일은 다 했다 머나먼 베를린의 벼룩시장에서 구한 식물 채집 표본은 .. 2022. 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