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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동 [손택수] 망원동 [손택수] 도라지 속살은 막 퍼올린 찬물 빛이다 역 귀퉁이 쓸모없어진 전화 부스 옆에서 하루종일 도라지 껍질을 벗기던 노인 도려낸 상처 위로 끼치던 그 정갈한 향을 나는 얼마나 좋아하였던지 코끝에 심심산골을 옮겨온 듯 시장 귀퉁이 들끓는 소음 먼지 속에 그저 정물처럼 묵묵히 앉아 있었다 지상에 와서 아까운 몇 가지를 뽑으라면 십년 넘게 내 귀갓길을 지켜준 노인의 도라지를 빠뜨릴 수 없으리라 껍질을 벗기는 일이 우물을 푸는 일이라 바가지 가득 넘실넘실 길어올리는 일이라 먼지잼처럼 지나가던 망원, 돌아와 보니 그곳이 가장 먼 곳이었네 -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2020 * 하늘이 멀어서, 희망이 멀어서, 사는 일이 너무 멀어서 그래서 망원동일까. 아니면 멀리 있는 희망을 보려고 망원동일까. 멀.. 2022. 2. 1.
사라지자 [이병률] 사라지자 [이병률] 마취 시킨 다음 통 말을 듣지 않게 될 나를 데리고 가서 사흘동안 눈 속에 갇힌 사람처럼 그렇게 있다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자 이번 생의 등판번호가 45라 하더라도 이번 생의 번호가 11b라 하더라도 영원히 지휘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손상되거나 훼손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니 반드시 사라지자 아무리 이 삶이 틀렸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라질 때 열쇠 하나를 숨기고 그 또한 의미가 될 거라는 순리를 기억할 것 그리고 내 열쇠는 누가 줍게 되는지 염두에 둘 것 압축되어 당당히 사라지자 당신도 원래 바다였다 당신이 어떤 세월에 휩쓸리다 살 곳을 정했다고 흐르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마라 모든 산은 바다였다 산의 정상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고 누.. 2022. 2. 1.
낙타가 되는 법 [강기원] 낙타가 되는 법 [강기원] 태산을 삼킨 자 태양에 맞서 고개를 들 것 뒤돌아서지 않을 것 스스로 그늘을 만들어 최대한 차가워질 것 친구를 포기할 것 누명에 익숙해질 것 펭귄의 시절을 기억할 것 모래 폭풍의 지도 속에서 대양의 지도를 읽을 것 하루치 양식으로 새벽노을 마신 후 살구 씨 몸 깊이 박고 없는 길을 떠날 것 그리고 . . . 울지 않을 것 다만 묵묵할 것 - 지중해의 피, 민음사, 2015 *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건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 이렇게 우린 은혜로운 이 땅을 위해 이렇게 우린 이 강산을 노래 부르네" 지극히 싫어하는 노래가사지만 군사정권하에서도 하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공정할 건 공정했고 부지런하면 돈을 벌었다. 대학을 가고 싶으면 어떻게든 진학해서 학.. 2022. 2. 1.
윤곽 [혜원] 윤곽 [혜원] ​ ​ 당신은 손의 윤곽이 열쇠와 닮아서 아침에 손을 떨어뜨린 사람 내 손은 정오의 구멍처럼 환하고 V자로 깎아 낸 아홉 개의 벤 자리와 여덟 개의 이가 있는 당신의 열쇠는 부드러운 곡률을 갖고 있어서 우리는 쉽게 통과하네 타인의 주머니에 쉽게 손을 맡기고 열쇠를 만지듯 가볍게 만지작거리고 백 년 동안 열쇠가 녹고 있지 녹은 자리가 예뻐서 당신이 또 손을 어루만지면 너무 헐거워 당신은 한 번도 내 손을 열지 못했지 다른 손이 필요하다고 믿었지 윤곽이 녹아서 백 년 동안 열쇠만 깎았지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한 일은 최선을 다해 손을 오므렸던 일 손을 펴면 열쇠의 깎은 자리가 사라지고 내 주머니에서 손이 사라지고 주머니에 타인의 열쇠가 가득하네 어느 날 모르는 손 하나를 쥐면 자물쇠의 깊.. 2022. 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