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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 오거리 [허림] 삼례 오거리 [허림] 전주에서 비빔밥을 먹고 주인이 맛보라고 권하는 모주도 한 잔하고 달착지근한 겨울 햇살 따라 길을 간다 어디가 어딘지 달리다보니 삼례 길이 많다 길옆 국밥집에 들려 손으로 빚는다는 순대를 달라하고 길을 여쭈니 이리 가면 이리고 저리 가면 전주고 고리 가면 고창이고 그리 가면 금산 여리 가면 여산인디유 얼루 가시는 지유 한자리 비면 저 샥시 강겡에 떨궈주고 가셔유 막차 발세 가버렸다고 저코롬 울상인데 달도 뜨면 긴긴 밤 훤히 가고 남겠시라우 - 이끼, 푸른 문장을 읽다, 지혜, 2013 * 길은 삼거리, 사거리, 오거리 등이 있다. 이짝, 저짝, 그짝, 고짝, 여짝...... 여짝은 여산이고 충남과 가까워서 이랬시유, 저랬시유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쓰나보다. 강겡도 강경을 말하는 것이니 .. 2022. 1. 27.
시 [안희연] 시 [안희연] 사실은 흰 접시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흰 접시의 테두리만 만지작거린다 너는 참 하얗구나 너는 참 둥글구나 내게 없는 부분만 크게 보면서 흰 접시 위에 자꾸만 무언가를 올린다 완두콩의 연두 딸기의 붉음 갓 구운 빵의 완벽과 무구를 그렇게 흰 접시를 잊는다 도망친다 흰 접시는 흰 접시일 뿐인데 깨질 것이 두려워 찬장 깊숙이 감추어놓고 흰 접시를 돋보이게 할 테이블보를 고르다가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언제든 깨버리면 그만이라는 듯이 말한다 듣고 있었을텐데 그럴 때 이미 깨져버린 것 깨진 거나 다름없는 것 * 오래전 내게 흰 접시가 있었어 어느 새벽 안개 자욱한 호숫가에서 발견된 총 이야기를 하듯이 흰 접시에 관해 말할 때가 있다 흰 접시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흰 접시를 그리워하느.. 2022. 1. 24.
이삭 줍는 사람 [성선경] 이삭 줍는 사람 [성선경] 교방초등학교 후문 GS 24시 앞 교방동 쌈지공원엔 꽁초 줍는 개똥지빠귀가 산다. - 장수하늘소, 서정시학, 2020 * GS 25는 있어도 GS 24는 없다. 시인은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 새벽 한시까지 돌아다니지 말라고 엄한 아버지처럼 24시로 통금을 내렸을까. 우리는 지금 아이엠에프보다 더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 나는 담배를 피운 적이 없어 담배값을 잘 모르고 살았지만 한 갑에 사천원이 넘는 돈이라고 하니 거의 한 끼니값이다. 아무것도 살 수 없는 개똥지빠귀에겐 공원에 널린 꽁초를 주울 수 밖에 없다. 시골 논에 과거엔 피를 뽑았지만 지금은 비싼 인건비 때문에 피를 그냥 둔다. 이삭도 주웠지만 지금은 철새들의 밥이 되어버렸다. 다시 과거로 회귀해 이삭 줍는 사람이 생.. 2022. 1. 24.
1등을 하다 [우대식] 1등을 하다 [우대식] 초파일 전 어느 날 잘 아는 암자, 스님의 상좌로부터 아름다운 문자 하나를 받았다 작년에 50등을 했는데 올해는 100등을 하고 싶다는 이 아름다운 문자를 받아들고 종교란 무릇 이런 것이라 생각했다 더 낮은 등수로 가고 싶다는 욕망 참 맑다 그러다 이런 등수는 누가 매기나 생각도 해보았다 무슨 종단인가? 아닐 것이다 종단이란 1등을 지향하지 않겠는가? 논에 물을 받으면서 들판은 아연 생명의 흔적으로 자욱했다 참 부처님께서 좋은 날 태어나셨구나 아래로의 욕망 10등을 돕고 싶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다가 등이 등불이라는 것을 알았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한국의 종단들이 1등을 지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머지 등은 마음에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에 매달아 주고 1등을 매달고 벙긋벙.. 2022.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