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 [이혜미]
썰물 지는 파도에 발을 씻으며 먼 곳을 버리기로 했다. 사람은 빛에 물들고 색에 멍들지. 너는 닿을 수 없는 섬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히는구나.
수평선은 누군가 쓰다 펼쳐둔 일기장 같아. 빛이 닿아 뒷면의 글자들이 얼핏 비쳐 보이듯, 환한 꿈을 꺼내 밤을 비추면 숨겨두었던 약속들이 흘러나와 낯선 생이 문득 겹쳐온다고.
멀리, 생각의 남쪽까지 더 멀리. 소중한 것을 잠시의 영원이라 믿으며, 섬 저편에 두고 온 것들에게 미뤄왔던 대답을 선물했지. 구애받는 것에 구애받지 않기로 했다. 몰아치는 파도에도 소라의 품속에는 지키고 싶은 바다가 있으니까.
잃어버리고 놓쳐버린 것들을 모래와 바다 사이에 묻어두어서 ..… 너는 해변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하나마다 마음을 맡기는구나. 먼 곳이 언제나 외로운 장소는 아니야. 아침의 눈꺼풀 속으로 희미하게 떠오르는 밤의 마중, 꿈의 배웅.
바래다줄게. 파도가 칠 때마다 해안의 경계선이 손을 내밀듯, 꿈을 밤 가까이 데려오기 위해 우리가 발명한 것들 중 가장 멋진 게 바로 시간이니까.
최대한 위태롭게 새끼손가락을 걸고 바다에 가자. 무게를 잊고 팽팽한 수평선 위를 걸어봐. 멀리를 매만지던 눈 속으로 오래 기다린 풍경들이 쏟아지도록,
- 빛의 자격을 얻어, 문학과지성사, 2021
* 아이엠에프가 시련으로 다가오던 시절 직장동료들과 구석에서 차를 마시며
미래의 암울함을 함께 나누었던 시간이 있었다.
그룹은 공중분해되어 이리저리 팔려나가던 때였다.
회사 그만두면 뭘 하지? 던져진 화두에 제주도 바닷가에서 집짓고 낚시나 하지요.
한 후배의 말에 또 한 후배가 그럼 난 이층에서 기원이나 하며 살지 했다.
나는 그래 그럼 난 일층 임대해서 책방이나 해야겠다, 했었다.
그 레파토리가 거의 일년은 지속되었는데 경기가 회복되고 흐지부지되었다.
그러고 이십년이 흐른 지금 낚시한다던 그 후배는 진짜 바닷가에 집 짓고
귤도 키우며 낚시를 즐기고 있다.
바닷가에 책방 내면 누가 책을 사줄라나.
바닷가의 풍경이 곧 책과 같아서 아무도 책은 사지 않겠지.
먼 나라의 아득한 꿈같은 얘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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