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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시 [안희연]

by joofe 2022. 1. 24.

프랑스 음식은 詩인가?

 

시 [안희연]

 

 

 

 

사실은 흰 접시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흰 접시의 테두리만 만지작거린다

 

너는 참 하얗구나

너는 참 둥글구나

내게 없는 부분만 크게 보면서

 

흰 접시 위에 자꾸만 무언가를 올린다

완두콩의 연두

딸기의 붉음

갓 구운 빵의 완벽과 무구를

 

그렇게 흰 접시를 잊는다 도망친다

 

흰 접시는 흰 접시일 뿐인데

깨질 것이 두려워 찬장 깊숙이 감추어놓고

 

흰 접시를 돋보이게 할 테이블보를 고르다가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언제든 깨버리면 그만이라는 듯이 말한다

 

듣고 있었을텐데

 

그럴 때 이미 깨져버린 것

깨진 거나 다름없는 것

 

*

 

오래전 내게 흰 접시가 있었어

어느 새벽 안개 자욱한 호숫가에서 발견된 총 이야기를 하듯이

흰 접시에 관해 말할 때가 있다

 

흰 접시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흰 접시를 그리워하느라 평생을 필요로 하는 삶

 

그건

다행일까 불행일까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2020

 

 

 

 

* 시의 재료가 언어이다 보니 다 비슷해 보일 수 있겠지만

시라는 접시에 완두콩을 올리느냐 딸기를 올리느냐 혹은 갓 구운 빵을 올리느냐로

완전히 다른 시가 된다.

언어를 올려서 어떤 감정을 보이게 하느냐, 어떤 사념에 빠지게 하느냐에 따라

좋은 시가 될 게다.

삶은 다 거기서 거기인데 접시위에 올려진 재료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적어도 시를 사랑한다면 접시도 사랑하고 접시위에 올려진 재료도 사랑해야 한다.

언어 하나하나가 하찮은 것은 없다.

시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필요로 하는 삶을 산다면 그게 다행이고 다복이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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