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감상

호두에게 [안희연]

by joofe 2022. 2. 4.

호두에게 [안희연]

 

 

 

 

 

부러웠어, 너의 껍질

깨뜨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심이 있다는 거

 

나는 너무 무른 사람이라서

툭하면 주저앉기부터 하는데

 

너는 언제나 단호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

한손에 담길 만큼 작지만

우주를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너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흐르는 것일까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어떤 위로도 구하지 않고

하나의 자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가졌다는 것

너는 무수한 말들이 적힌 백지를 내게 건넨다

 

더는 분실물센터 주변을 서성이지 않기

'밤이 밤이듯이' 같은 문장을 사랑하기

 

미래는 새하얀 강아지처럼 꼬리 치며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새는 비를 걱정하며 내다놓은 양동이 속에

설거지통에 산처럼 쌓인 그릇들 속에 있다는 걸

 

자꾸 잊어, 너도 누군가의 푸른 열매였다는 거

세상 그 어떤 눈도 그냥 캄캄해지는 법은 없다는 거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나날이 쪼그라드는 고독들을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2020

 

 

 

 

 

*깨뜨린 호두는 호두인가, 아닌가.

깨뜨린 호두와 깨뜨리지 않은 호두는 다른가.

둘 다 호두일 것이다.

단호한 호두, 단호하지 않은 호두.

현실은 단호함을 요구하기도 하고 단호함을 요구하지 않기도 한다.

설거지통에 담긴 그릇을 닦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

닦는데 단호함이란 필요치 않다.

살면 살수록 쪼그라드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나에게도 너에게도 단호함을 요구하지 않기로 하자.

한때 우리 모두 푸른 열매였었던 것만을 기억하며.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 혼자 공중에서 오래 우는 이가 있다 [조영란]  (0) 2022.02.05
종점 의자 [김수우]  (0) 2022.02.04
희나리에 대하여 [오태환]  (0) 2022.02.04
망원동 [손택수]  (0) 2022.02.01
사라지자 [이병률]  (0) 2022.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