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감상

나무에 걸린 은유 [전영관]

by joofe 2022. 2. 10.

천리포 수목원의 목련나무

 

나무에 걸린 은유 [전영관]

 

 

 

 

내 안의 꽃이 다 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꽃이 보인다

 

만발해 너울거리는 자태보다

잔바람에 떨어져 낡아가는 꽃잎들이 먼저 보인다

 

하, 저 꽃잎들은

 

어미를 잃고 헤맨 어린것의 발뒤꿈치

저를 감당하지 못해 야반도주한 청춘

이별을 참다가 뛰쳐나와 진흙 묻힌 버선

바람같이 근본도 없는 것들하고 섞이느라

평생이 한나절인 듯 녹슬어버린 몸

사랑 따위에 발목 잡혀 승천하지 못한 선녀들의 군무

왕자나 기다리는 신데렐라들의 순은 구두

죽음만큼 나른한 저승의 봄을 옮기는 나비 날개

하늘을 연모한 까닭에 나무에 피어난 수련(睡蓮)

다림질하며 오시는가 바라보다 태워버린 버선

삼천배 앞에 미소 짓는 애기보살의 무릎

세상에서 하나뿐인 백옥을 캐다 스러진 광부의 아내

거문고 없이 앉아만 있어도 취하는 기생 손목

이마에 붙이면 지옥도 면하는 부적

보름이면 달빛을 음미하는 신의 숟가락

전생을 돌고 돌아온 저 하뭇한 숭어리들을

목련이라 감탄하겠다

 

                     - 슬픔도 태도가 된다, 문학동네, 2020

 

 

 

 

* 꽃다운 나이일 때가 있다.

꽃잎 하나하나에 다 다른 역사가 있고 각기 다른 세상이 있고

삶의 이야기들이 있고 꽃다운 얼굴들이 있다.

꽃이 지고나서야 꽃이 제대로 보인다니 슬프지만

꽃이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하,

감탄사를 뱉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아름답기만하다.

 

(천리포 수목원에 가면 노란 목련나무가 있다.

목련꽃이 꽃다운 나이일 때 꽃 보러 가자.)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의 애인 [김중일]  (0) 2022.02.12
그대라는 시 [권지영]  (0) 2022.02.10
시선들 [최문자] / 새는 날아가고 [나희덕]  (0) 2022.02.10
시인의 덕목 [황옥경]  (0) 2022.02.05
노랫말처럼 [김행숙]  (0) 2022.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