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 - 고 사노 요코*에게 [문성해]
돈이나 목숨 아끼지 말고 살다가
말년엔 두 달 남았다는 미남 의사의 말을 듣고 싶다
어차피 두 달 살건데 하며
저축해 둔 돈도 아끼지 말고 펑펑 쓰고 싶다
푸른 독일제 재규어 한 대 사서 추월로(追越路)로만 다닐 것이다
친구들에게 두 달 남았다고 하며
제일 좋은 옷과 가방도 벗어 줘야지
그러다 덜컥 두 달 넘어 살게 되면
미남 의사는 좀 난처 해지겠지
통장의 잔고도 바닥나겠지
그렇지만 나는 돈을 벌지 않을 것이다
난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으므로
햇볕과 비와 바람을 공짜로 쐴 것이다
무전취식을 할 것이다
경찰서에도 수시로 들러
미친 할마씨란 소리도 들을 것이다
난 남은 생을 바짝바짝 담배꽁초처럼 태워야지
목숨을 놓고 삶과 거래를 해야지
그러다가 자꾸 명이 길어지면
본전 생각난 친구들도 다 끊기고
이곳에 왔을 때처럼 난 발가벗겨지겠지
돈 없이 명을 잇는 게 거지라면 난 거지가 되겠지
죽음이 마침내 날 건드리며 공짜로 치워줄 때까지
난 진정한 지구인으로만 살 것이다
귀신이 따로 없을 것이다
* 사노 요코(佐野洋子, 1938~2010): 아동문학가. 이 시는 그녀의 산문집 「죽는 게 뭐라고」를 일부 인용함.
** 이영광 시인의 산문집 제목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를 인용.
- 내가 모르는 한 사람, 문학수첩, 2020
※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별들이 많이 있겠지만 지구인처럼 살아가는 생명체도 있을라나.
아니, 어쩌면 지구인보다 몇만배 똑똑하고 최첨단 문명을 가지고 살아갈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그건 모르겠고 그냥 지구인만 생각한다면,
울면서 지구에 와서 지구인으로 살다 웃으면서 지구를 떠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네.
내가 태어날 때 부모님들은 웃었을 테고
내가 죽을 때는 내가 낳은 자식들이 울겠지.
공평하게 대물림으로 살다 가야지.
돈 벌러 지구에 온 건 아니니 떠날 때는 돈 없이 말 없이 빈손으로 가자구.
죽는 게 뭐 별 거 있겠어.
잘 살다가 가자. 내가 나에게 안녕, 안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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