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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빈 손 [최문자]

by joofe 2022. 6. 9.

 

 

 

 

빈 손 [최문자]

 

 

 

 

하나님은 모처럼 옆에 있는데

나는 둥근 무릎이 없고 긴 머리털이 없고 향유가 동이

난 여자

 

마리아가 꿈처럼 옥합을 깨뜨릴 때

나는 1데나리온*을 위해 강의하러 갔지

주머니 단팥빵은 얼고

눈보라가 쏟아졌다

 

텅 빈 겨울

아무나 그런 눈보라 꿈을 꾸나

 

나의 기름은

꿈이 없나 봐

나의 빵은 언제 향유가 되나

 

저기 지나가는 여자들 모두 향유가 넘쳐

여름에 앞치마 가득 꺾어 둔 나드 꽃

꽃이 넘쳐

 

마리아는 데나리온을 셀 줄 몰라. 300데나리온을 그냥

흘려보내. 흐르다 옥합을 깨뜨리고 다 흐르고 나니 나드

꽃은 눈물이 되었지.

 

흐를 수 없어 빈 손 문지르며 저기 길에 서 있는 여자

함박눈이 쏟아졌지

 

빵은 주머니에서 고드름처럼 얼어붙고

자꾸 목이 메었다

 

향유보다 눈물이 먼저네

나는

 

*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부은 나드 향유의 가격을 당시 화폐로 환산한 가

치. 1데나리온은 건장한 남자가 하루 종일 일하고 받는 임금임.

 

                -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민음사, 2022

 

 

 

 

 

* 하나님이 날이면 날마다 나타나는 게 아닌데 모처럼 옆에 있다니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의 머리에 부울, 혹은 발에 부울 향유가 없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옥합에 든 나드 향유는 300데나리온을 주어야 하는 고가이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중 삼백일을 일해서 벌어야 옥합 한 병을 살 수 있다.

이런 엄청난 옥합을 깨뜨려 흘려보낸다는 건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경배일 게다.

손이 붉다는 건 맨손이라는 것이고 맨손이라는 것은 빈 손이라는 의미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이에게는 빈 손에 향유 한 방울도 묻힐 수 없는 가여운 처지이다.

그런데 모처럼 하나님이 와도 향유 한 방울을 바칠 수 없으니 향유보다 눈물이 앞설 수밖에.

얼어버린 빵을 먹고 사는 나에게는 향유 한 방울도 드릴 수 없으니 하나님이여, 나의, 이 언 빵을 향유로 바꾸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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