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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창밖이 푸른 곳 [박은지]

by joofe 2022. 7. 31.

 

 

 

 

창밖이 푸른 곳 [박은지]

 

 

 

 

  그렇게 하면 너의 이름이 지워지는 것입니까

 

  창밖은 푸르고, 우리는 매일 모여 너의 이름을 지운다.

지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오늘 너의 이름은 눈으로 하자. 꼭꼭 뭉쳐도 그럴듯하고,

입속에 넣고 휘파람을 불어도 좋지. 흘러내리는 이름을 물

감 삼아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찢어 이곳저곳에 붙이면 아

름답다. 아름다움을 구경하는 일이 좋았다. 우리는 교탁 아

래 숨겨 놓은 구슬을 찾거나, 잠자리알을 구경하며 서로의

귀를 막아 주었다. 우리가 지운 너의 이름을 모란 무늬 셔

츠에 더듬더듬 새겨 넣는 일도 중요했지만, 창밖 누군가가

손전등을 비출까 겁내는 일도 중요했다. 다시 태어나면 어

쩌지. 의자를 모두 뒤집어 쥐를 찾기도 했다.

 

  한데 모아 작은 웅덩이를 만들자. 오늘 너의 이름은 비.

웅덩이에선 풀이 자라고, 우리가 지닌 여러 바닥의 얼룩이

웅덩이를 장식하기도 했다. 멋진 이끼에 감탄하며 손으로

쓱쓱 밀었다. 이름은 금세 초록색으로 변했다. 초록색 비는

아름답다. 너의 이름은 창밖에 흐르는 구름처럼 녹아서 우

리의 물장구 사이로 말라 버릴 거야. 그런 믿음으로 지운

다. 지워지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글쎄······나는 사실 어제의 너였다고 말하면 대답이 될까

 

  창밖은 푸르고, 사람들은 파도를 구경했다. 파도에 밀려

온 털 뭉치나 나무 조각, 농약병 등을 주웠다. 머리가 반쯤

없는 인형의 모란 무늬 셔츠가 가위에 잘려 나갔고, 찌그러

진 탁구공과 낙석 주의 표지판 같은 것들이 한데 모였다.

누군가는 손전등을 들고 여기저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 여름 상설 공연, 민음사, 2021

 

 

 

 

 

* 비가 오면 창 넓은 찻집에 앉아 비멍을 때리고 싶고

날이 청명해서 하늘이 푸르르면 하늘멍을 때리고 싶다.

어제는 배나무숲 한가운데 카페를 만든 '배나무숲'이라는 곳에 가서 숲멍을 때렸다.

덤으로 흰 구름 두둥실 뜬 하늘멍까지 겹멍을 때렸다.

커피 한 모금에 배나무를 바라보고, 또 커피 한 모금에 흰 구름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멍 때리는 것은 나의 뇌세포를 하나씩 지우는 일이기도 했다.

무럭무럭 커지던 뇌가 너무 힘겹고 쓸데없는 것들을 저장하고 있었던 까닭에

조금씩 이름을 지우고 기억을 지우고 필요한 것만 남겨서

뇌가 평안을 얻도록 하는 일이다.

농약병이나 찌그러진 탁구공까지 뇌에 저장해서 무슨 평안을 누리겠는가.

분리수거하고 큰 마대자루에 하나씩 둘씩 담아 버려버리자. 매일매일!

오늘도 숲멍을 때리러 배나무숲으로 달려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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