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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잡기 [조온윤] 중심 잡기 [조온윤] 천사는 언제나 맨발이라서 젖은 땅에는 함부로 발을 딛지 않는다 추운 겨울에는 특히 더 그렇게 믿었던 나는 찬 계단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언 땅 위를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골몰했다 매일 빠짐없이 햇볕 쬐기 근면하고 성실하기 버스에 승차할 땐 기사님께 인사를 하고 걸을 땐 벨을 누르지 않아도 열리는 마음이 되며 도무지 인간적이지 않은 감정으로 인간을 위할 줄도 아는 것 혹은 자기 희생 거기까지 가닿을 순 없더라도 내가 믿는 신이 넘어지는 나를 붙잡아줄 것처럼 눈 감고 길 걸어보기 헛디디게 되더라도 누구의 탓이라고도 생각 않기······ 그런데 새벽에 비가 왔었나요? 눈을 떠보니 곁에는 낯선 사람들이 있고 겨드랑이가 따뜻했던 이유는 그들의 손이 거기 있었기 때문 나는 .. 2022. 6. 10.
저수지 [박완호] 저수지 [박완호] 저수지는 커다란 구멍으로 구름을 삼켜댔다. 저수지가 입을 벌렸다 다물 때마다 수면에 맺힌 그림자들이 한꺼번 에 지워졌다. 구름에 가려 있던 새들까지 삼켜버린 걸까? 허공을 흔들어대던 새 울음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을 때 도 있었다. 날개 없는 것들은 잔물결을 타고 물가를 끊임 없이 떠돌았다. 모로 드러누운 산 그림자를 삼키다 말고 게 워내는 물빛이 역류성식도염처럼 검푸르게 반짝였다. 저 녁이면 고무 탄내를 풍기며 비포장길을 돌아가는 바퀴 소 리가 산 그림자 속을 파고들었다. 젊은 부부가 나란히 누운 산등성이 쪽으로 부는 바람은 자주 노을빛을 띠었지만 깊 은 밤 저수지를 서성이는 사람의 속내까지는 물들이지 못 했다. 물 위에 뜬 그림자들을 삼켜댈수록 저수지 가를 떠도 는 그림자들은 점점 .. 2022. 6. 9.
빈 손 [최문자] 빈 손 [최문자] 하나님은 모처럼 옆에 있는데 나는 둥근 무릎이 없고 긴 머리털이 없고 향유가 동이 난 여자 마리아가 꿈처럼 옥합을 깨뜨릴 때 나는 1데나리온*을 위해 강의하러 갔지 주머니 단팥빵은 얼고 눈보라가 쏟아졌다 텅 빈 겨울 아무나 그런 눈보라 꿈을 꾸나 나의 기름은 꿈이 없나 봐 나의 빵은 언제 향유가 되나 저기 지나가는 여자들 모두 향유가 넘쳐 여름에 앞치마 가득 꺾어 둔 나드 꽃 꽃이 넘쳐 마리아는 데나리온을 셀 줄 몰라. 300데나리온을 그냥 흘려보내. 흐르다 옥합을 깨뜨리고 다 흐르고 나니 나드 꽃은 눈물이 되었지. 흐를 수 없어 빈 손 문지르며 저기 길에 서 있는 여자 함박눈이 쏟아졌지 빵은 주머니에서 고드름처럼 얼어붙고 자꾸 목이 메었다 향유보다 눈물이 먼저네 나는 * 마리아가 예수.. 2022. 6. 9.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요 [김안녕]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요 [김안녕] 아부지 이제 아무 전화나 받고 공짜로 뭘 준다고 해도 듣지 마세요 예, 아부지? 이거 이 년 약정이니까 해지 못 해요 이 년 동안은 무조건 이거 쓰셔야 해요 안 그러면 또 위약금 물어야 돼요 ―그랴 내가 그날 뭐에 씌어서 그런데 내가 이 년은 살 수 있을랑가 모르것다 그 대목에 왜 웃음이 났을까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책 제목처럼 죽고 싶지만 새 핸드폰은 갖고 싶은 마음 그 마음 때문에 실실 웃음이 난다 농담과 진담을 구별할 수 없는 날들 어제 놓친 버스를 오늘 또 놓친다 - 사랑의 근력, 걷는 사람, 2021 * 어느 가문에서 가훈을 만들려고 좋은 말들을 죄다 끌어 모아 빼고 빼고 빼다가 마지막에 남은 게 ‘세상에 공짜는 없다’였다고 한다. 공짜면 양잿물도 .. 2022. 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