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78 나의 거룩 [문성해] 나의 거룩 [문성해] 이 다섯 평의 방 안에서 콧바람을 일으키며 갈비뼈를 긁어 대며 자는 어린 것들을 보니 생활이 내게로 와서 벽을 이루고 지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조금은 대견해 보인다 태풍 때면 유리창을 다 쏟아 낼 듯 흔들리는 어수룩한 허공에 창문을 내고 변기를 들이고 방속으로 쐐애 쐐애 흘려 넣을 형광등 빛이 있다는 것과 아침이면 학교로 도서관으로 사마귀 새끼들처럼 대가리를 쳐들며 흩어졌다가 저녁이면 시든 배추처럼 되돌아오는 식구들이 있다는 것도 거룩하다 내 몸이 자꾸만 왜소해지는 대신 어린 몸이 둥싯둥싯 부푸는 것과 바닥날 듯 바닥날 듯 되살아나는 통장잔고도 신기하다 몇 달씩이나 남의 책을 뻔뻔스레 빌릴 수 있는 시립도서관과 두 마리에 칠천원 하는 세네갈 갈치를 구입할 수 있는 오렌지마트가 가까이.. 2022. 5. 27. 하이에나의 시 [유미애] 하이에나의 시 [유미애] 그림자를 우물거리며 울어본 적 있나요 자꾸 수염이 자라요 생각들이 우글거려요 몬탈레와 썩은 고기가 있는 비 탈, 작은 나무 아래가 나의 터 죽음의 냄새를 쫓는 두 눈의 광기와 지독한 비린내가 물려받은 내 이 름인데 왜 아침이면 구렁 속의 묘비명을 꺼내어 닦는 걸까요 설피를 입에 물고 잠든 늙은 수컷을 봤어요 얇은 베옷 같은 노을이 산 꼭대기를 감싸고 끊어진 눈물자국이 마지막 구절처럼 빛났죠 나무에 기대어 있었어요 어린 발톱들이 그 간결한 묘사를 다 베낄 때 까지 그의 램프가 골짜기와 봉우리를 지우고 고요해질 때까지 내 수염은 왜 자랄수록 구부러지는 걸까요 눈이 녹으면 돌멩이와 꽃 이 날아들던 그의 자리는 또 다른 나무가 채울 텐데 길고 어두운 페이 지가 펼쳐지면 나는 피 묻은 연.. 2022. 5. 26. 긴긴 밤 [신용목] 긴긴 밤 [신용목] 나는 하루를 살았는데, 생각 속에서 삼년이 지나가고 넌 그대로구나? 꿈에서는 스물하나에 죽은 친구가 나타나, 우리가 알고 지낸 삼년을 다 살고 깨어나면 또 죽고 열아홉 살이었을까요, 다락방에서 고장 난 시곗바늘을 빙빙 돌리다 바라보면 창밖은 시계에서 빠져버린 바늘처럼 툭 떨어진 어둠 그러니까 열아홉을 떠올리는 일은 열아홉이 되는 일이 아니라 열아홉까지의 시간을 다 살게 하는데, 어둠 속에 촘촘히 박혀 있는 시곗바늘처럼 창밖에는 숲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들었을 뿐, 생각은 해마다 달력을 찢기 위해 먼 나무를 쓰러뜨리는 푸른 벌목장입니다 숲이 사라지면 초원이 초원이 사라지면 사막이 죽은 짐승의 뼈를 하얀 가루로 날릴 때, 모래에 비스듬히 꽂힌 뿔이 가리키는 침묵처럼 세벽 세시 외에는 아무것.. 2022. 5. 21. 17번 홀에서의 무반주 첼로 독주 [송찬호] 17번 홀에서의 무반주 첼로 독주 [송찬호] 첼로 홀로 무대 한 가운데 앉아 있다 첼로 연주자와 첼로 악보는 술주정뱅이 음악과 함께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았다 세계는 루머로 가득 차 있다 신흥 종교가 발생한 복음의 땅으로 황금 좌변기들이 떼지어 날아간다 양귀비들은 다시 국경을 넘었다 이제 그 붉은 난민들을 받아줄 곳은 지상 어느 나라에도 없다 어느 도시에서는 독특한 시위 방법으로, 정기적으로 창밖 거리로, 일제히 냄비를 집어 던진다 아라비안나이트는 파탄이 났다 양탄자와 요술램프가 전격 이혼을 발표했다 세계는 곧 어두워졌다 객석에 검은 별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다 첼로는 여전히 무대에 고적하게 앉아 있다 연미복 첼로 연주자와 양피지 첼로 악보는 비틀거리는 음악을 부축하고 연주회장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골.. 2022. 5. 20. 이전 1 ··· 10 11 12 13 14 15 16 ··· 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