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78 업 [신미균] 업 [신미균] 바위가 쑥부쟁이 하나를 꽉, 물고 있다 물린 쑥부쟁이는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구부정하다 바람이 애처로워 바위를 밀쳐 보지만 꿈쩍도 안 한다 바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쑥부쟁이는 그래도 고마워서 바람이 언덕을 넘어갈 때까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파란, 2020 * 바위는 자기 몸을 부수어 약간의 오목한 곳을 만들고 그곳에 먼지와 씨앗과 자신의 몸 일부를 두었다. 씨앗은 자라 바위의 일부와 먼지를 움켜쥐고 자신의 생을 산다. 지나가는 바람은 낭창낭창한 쑥부쟁이가 불쌍하여 바위를 밀어보려 하지만 자연은 늘 힘센 놈이 왕이다. 바람은 머쓱해서 지나가지만 쑥부쟁이는 그마음을 알아차리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바위가 베풀어준 은혜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한.. 2022. 4. 6. 물이 빠지면서 [박상천] 물이 빠지면서 [박상천] 말라버린 잎새들은 푸르렀던 시절,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잎맥을 선명히 드러낸다. 잘 보이지 않던 잎맥을 드러내며 말라가는 나뭇잎. 물이 빠지는 개펄도 마찬가지다. 간조가 되면, 물이 드나들던 물길이 선명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물이 차 있을 땐 보이지 않던, 갯골을 선명히 드러내며 누워있는 개펄. 누구나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 그를 지탱해왔던 것이 무엇인지, 그가 숨기고 있었거나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드러나는 법이다. - 시와함께 21년 겨울호, 시인시대 2022 봄호 * 며칠 전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갔다. 왼쪽 팔을 내밀고 피를 뽑았다. 피를 뽑는 간호사가 '운동 안 하세요?' 말을 건다. 어떻게 아셨어요, 운동 안 하는 것을...... '팔이 가늘잖아요!' 잘 보.. 2022. 4. 2. 최후의 만찬 [정한용] 최후의 만찬 [정한용] 기차를 기다린다. 여덟 식구가 짐 보따리 위에 앉아 있다. 모두 말이 없다. 딱딱거리던 군인도 지금은 딴청을 부린다. 담배 파는 아이가 지나간다. 노인이 아이를 불러 반지를 빼주고 캐러멜을 산다. 면도칼을 꺼내 여덟 조각으로 나눈다. 가족 모두 하나씩 먹는다. 기적이 울린다. 아우슈비츠. - 천년 동안 내리는 비, 여우난골, 2021 * 영화 '피아니스트'에 나오는 한 장면을 묘사한 거다. 유태인이라는 죄로 기차역에 끌려온 사람들은 죽음의 길로 가는 길목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마지막 행위를 한다. 죽는 사람에게 반지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물론 반지에 어떤 사연이 배어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죽을 것을 예감하는데 캬라멜 한 조각이라도 등분해서 식구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했다... 2022. 3. 30. 꽃은 혼자서 피고 진다 [김동호] 꽃은 혼자서 피고 진다 [김동호] 꽃 왈칵 피었구나 마음 부신 슬픔이다 너, 뉘게 꽃이었나 나도 꽃이었던가 저 혼자 피었다 진다 소리없이 저 혼자 - 꽃 통곡, 엉엉 붉어라(김동호시조집), 달아실, 2020 * 발문 "말과 글의 매혹에 끝내 사로잡힌 자로 사시게" (시조 백담 발간에 부쳐) 김영옥 어느 일간지에 자네 시가 게재된 걸 보고 "호작질도 10년쯤 하니 도가 되네"라며 쥐어박듯이 말 건넨 때로 부터도 다시 10년은 더 된 것 같네. 말과 글, 그쪽 세계의 견결(堅潔)함을 알기에 쉽게 건너다보고 싶지 않아 그저 저자의 속악(俗惡)에서 남루(襤褸)를 걸치고 그 세상과는 무관한 듯이 살고 싶구만 이리 들이미니 피할 도리가 없네. 무엄하게도 '도(道)'라는 말을 했거니와 살아보니 삶과 그 주변의 살이가.. 2022. 3. 29. 이전 1 ··· 22 23 24 25 26 27 28 ··· 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