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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이미산] 낮달 [이미산] 흉터는 머무는 바람입니다 사라진 꽃들의 무덤입니다 내 몸에 남아있는 당신입니다 작은 입구 작은 내면 작은 고요 모든 작은 것들의 뿌리입니다 인기척에 마음 한 귀퉁이 흔들려 마주 보는 지점입니다 한낮의 적요로 번지다 감기지 않는 눈동자로 떠돌다 어느 정수리에 내려앉아 분명해집니다 골똘해지는 생각의 한켠에서 잠시 뒹굴다 홀연히 사라지는 그래서 조금 미안하고 조금씩 그리워하는 마당을 쓸고 마루를 닦고 허공의 한 지점을 가늠해보는 오래 아껴둔 흔적입니다 몽당빗자루처럼 앉아 졸고 있는 노파의 몸속을 통과하는 저 외롭고 고단한 길이 너무 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폐업의 자세로 남겨진다 해도 출처의 흔적들 훨훨 날아 너무 야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초승을 당겨오는 검지가 구부러졌다 펴지는 사이 어느 조팝.. 2022. 3. 17.
무심천의 한때 [천양희] 낮달, 노명희화가 그림 무심천의 한때 [천양희] 무심천 변에서 무릎 세우고 몇시간을 보냈다 무심 속에서 온통 물을 이루는 물방울 물보라 물거품들 수심을 들여다보다 무심코! 없을 無에 대해 생각해본다 무욕과 무등(無等)과 무소유의 나날들 그동안 집착하던 것들로 목이 메었다 몸은 벌써 강물에 젖고 마음이 밀물처럼 빠져나간다 무슨 억하심정으로 일생이여. 속세에 갇혀 속수무책인가 나는 유한한 존재로서 세상에 혹하고 싶었다 불혹이든 물혹(勿惑)이든 달랑거리면서 무언(無言)이든 묵언이든 무슨 업이든 生으로. 낚싯줄 몇, 길게 던진다. 파문의 생기(生氣)! 문득 살얼음 드는 생의 생각들 수초처럼 잠겨 없을 無 없을 無 흘러간다 생이 어떻게 무감동인가 무의미한가 무력한가 무색하여 나는 오늘 흰눈썹울새처럼 이동하고 싶다.. 2022. 3. 13.
우리는 낙엽처럼 [나희덕] 우리는 낙엽처럼 [나희덕] 우리는 낙엽처럼 떠돌고 있어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러나 한번도 잊은 적 없는 당신을 찾아서. 세상은 우리의 무임승차를 허락하지 않아요. 바람과 안개만이 우리를 데려다주지요. 오늘은 눈까지 내렸어요. 죽어가던 흰 말은 눈 위에서 죽어버렸고 저녁은 그만큼 어두워졌지요. 우리는 낙엽처럼 서로 몸을 포개고 잠이 들어요. 꿈속에서 당신을 만났지만, 당신은 인화될 수 없는 필름 속에만 있어요. 손을 뻗으면 금방 닿을 듯한 안개 속의 한 그루 나무, 그러나 그 나무는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몰라요. 그래도 우리는 계속 걸어요, 안개가 우리를 완전히 지워줄 때까지. 처음 사랑에 눈을 뜬 것도 피 묻은 손으로 치마를 끌어내린 것도 안개 속에서였지요.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당신의 목소리가.. 2022. 3. 13.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서 [문정희]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서 [문정희]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어요? 한탄과 감상의 곰팡이, 하수구에서 올라 온 흙탕물에서 헤엄쳐요 갑옷을 입고 비를 피해 서있는 겁쟁이들이 언어를 방귀처럼 내 질러요 대형 마트에 시를 납품한 후 기득상권 속에 서있는 을씨년스런 어깨들이 동네 장마당에서도 좀 팔려야 한다며 위로와 교훈의 호흡으로 응석을 떨어요 장사꾼의 내비게이션을 장착한 날개들이 이 나무에서 저 나무 가지로 날라 다녀요 어떤 것은 과장된 가치와 역할을 강조하고 어떤 것은 난장에서 나온 민예품처럼 낡아가요 "이거 무슨 물건이죠?" "그걸 모르시다니...꼰대...?" 블랙리스트 보다 블랙홀이 더 두려워요 독특하지 않으면 백지가 더 빛나요 활자를 겁내지 말고 날카로운 못으로 파세요 시는 충동이자 충돌 사랑이 그.. 2022. 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