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278

플라스틱 인간 [최순섭] 플라스틱 인간 [최순섭] 어렴풋이 몇 대째인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유전자 몸속에는 플라스틱 피가 흐르고 있어 플라스틱 자궁에서 플라스틱 탯줄을 달고 태어나 플라스틱 인간으로 살아왔어 눈물도 모르는 플라스틱 여자 차가운 성질의 플라스틱 남자 열 받으면 녹아내리는 플라스틱 사랑으로 세상에 툭 던져놓은 원치 않는 플라스틱 아이는 플라스틱 비행기에 몸을 싣고 플라스틱 찬란한 도시로 유학을 떠나지 버림받을 걸 알면서 껌딱지처럼 달라붙는 플라스틱 여자 플라스틱 남자 감각이 없는 플라스틱 사랑은 구름 속에 모여 검은 파티를 하지 하늘을 날아다니며 플라스틱 비를 뿌리고 플라스틱 초록 바다에 꼬리 흔들며 헤엄쳐가는 플라스틱 물고기 파도가 밀려오면 지칠 줄 모르고 뼛가루가 스밀 때까지 갯바위에 살을 부비는 플라스틱 사랑은.. 2022. 2. 18.
먼 곳이 있는 사람 [손택수] 먼 곳이 있는 사람 [손택수]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 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 걷는 것도 끊는 거니까 차를 끊고 돈을 끊고 이런저런 습관을 끊어보는 거니까 묵언도 단식도 없이 마침내 수행에 드는 사람 걷는 사람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 길을 찾는 핑계로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가던 경포호가 언제든 갈 수 있는 집 근처 호수공원이 되어버렸을 때를 무던히 가슴 아파 하는 사람 올림픽 덕분에 케이티엑스 덕분에 더 멀어지고 만 동해를 그리워하는 사람 강릉에서 올라온 벗과 통음을 하며 밤을 새우던 일도 옛일이 돼버리고 말았으니 올라오면 내려가기 바쁜 자꾸만 연락 두절이 되어가는 영 너머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 먼 곳.. 2022. 2. 15.
비눗방울 하우스 [심재휘] 비눗방울 하우스 [심재휘] 광대분장을 한 사내가 박물관 앞 광장에서 두 팔을 휘저으니 큰 비눗방울이 생긴다 아이들은 제 키만한 방울 속으로 들어가려고 뛰어다닌다 물로 부푼 집을 만져보려다 이내 비눗물을 뒤집어써도 미끌거리며 깔깔거린다 나도 저런 얇다란 잠 속에 한 몸 들어가 꿈을 꾼 적이 있었던 것 같고 어룽거리는 바깥을 내다보며 웃다가 깨어 어둠 속에 오래 앉은 적도 있는 것 같다 박물관 문은 닫히고 그 사내가 바닥에 깔아놓은 비닐 장판을 걸레로 훔치면 아이들이 사라진 저녁이 온다 분장을 지운 사내는 가방을 든 하루를 메고 제가 만든 비눗방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유물이 되지 못한 그의 하루는 터져서 길바닥에 흥건해도 방울 속 뒷모습은 멀어지며 무지갯빛이다 그는 비눗방울 속에서 오늘도 터지지 않는 꿈을.. 2022. 2. 15.
뜻도 모르고 읽는 책 [심재휘] 뜻도 모르고 읽는 책 [심재휘] 처음 가보는 바닷가였는데 해변의 여관방에 자리를 깔고 누웠더니 그곳에는 어두울수록 잘 읽히는 책이 있었다 밑줄을 칠 수도 없고 귀를 접을 수도 없는 사실은 읽어도 뜻을 알 수 없는 책 그 옛날 고향의 순긋 해변에 가면 무허가 소줏집에 가면 레코드 판을 따라 돌아가던 노래 아껴듣던 그 노래를 생각하는 밤이었는데 노래는 시들고 소줏집은 철거되고 그러다가 몸은 누워 잠이 들었는데 뜻도 모른 채 페이지만 절로 넘어가는 책 똑같은 소리가 밤새 계속되는 것 같아도 잘 들으면 매번 다른 소리를 내어서 잠들기 전에 소리를 세는 가련한 밤이었는데 나는 그 책을 버리지 못하고 들고 온 모양이라 오늘은 그 먼 바닷가가 곁에 와 함께 눕는 밤이다 뜻도 모르고 다만 사전에도 없는 그 순긋한 소리.. 2022.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