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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걸린 은유 [전영관] 나무에 걸린 은유 [전영관] 내 안의 꽃이 다 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꽃이 보인다 만발해 너울거리는 자태보다 잔바람에 떨어져 낡아가는 꽃잎들이 먼저 보인다 하, 저 꽃잎들은 어미를 잃고 헤맨 어린것의 발뒤꿈치 저를 감당하지 못해 야반도주한 청춘 이별을 참다가 뛰쳐나와 진흙 묻힌 버선 바람같이 근본도 없는 것들하고 섞이느라 평생이 한나절인 듯 녹슬어버린 몸 사랑 따위에 발목 잡혀 승천하지 못한 선녀들의 군무 왕자나 기다리는 신데렐라들의 순은 구두 죽음만큼 나른한 저승의 봄을 옮기는 나비 날개 하늘을 연모한 까닭에 나무에 피어난 수련(睡蓮) 다림질하며 오시는가 바라보다 태워버린 버선 삼천배 앞에 미소 짓는 애기보살의 무릎 세상에서 하나뿐인 백옥을 캐다 스러진 광부의 아내 거문고 없이 앉아만 있어도 취하는 기.. 2022. 2. 10.
시선들 [최문자] / 새는 날아가고 [나희덕] 시선들 [최문자] 아까부터 사과들이 나를 쳐다보네 나는 딴 생각 반, 사과 생각 반으로 보는데 사과나무는 온 사과들을 다 데리고 나를 보네 사과 사이사이에 새가 있네 울어 줄 새를 안고 살았나 보네 어쩌다 새의 작은 눈알과 마주쳤네 새까지 고집스럽게 나를 쳐다 보네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네 사과가 없어진 나를 보네 뻥뻥 구멍 뚫린 나를 보네 누구와 누구가 사과를 다 따 갔는지 의심하며 보네 내가 놓아 버린 사과들을 찾고 있네 사과 뒤에서 달이 뜨고 있네 알알이 불을 켜고 나를 쳐다보네 이대로 둘까 어쩔까 그런 생각으로 쳐다보네 사과들이 방패를 뚫고 나를 찌르네 사과와 새와 달빛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나를 죽이네 사과 무덤에 내가 묻히네 새가 무섭게 울고 있네 - 사과 사이사이 새, 민음사, 2012 새는 .. 2022. 2. 10.
시인의 덕목 [황옥경] 시인의 덕목 [황옥경] 문배마을로 가는 임도에서 불독사를 만났다 붉은 몸 둥글게 또아리를 틀고 햇살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잿빛 바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유유자적 봄볕을 즐기고 있었다 호들갑스러운 외침에 눈을 뜬 불독사, 누홍초 같은 혀를 날름거리다 또아리를 풀고 머리를 곧추세운다 유유히 몸 풀어 주위를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마주친 불독사가 쩍, 입을 벌린다 흠칫 뒤로 물러서는 나를 보고 싱긋 웃는 듯하더니 미동도 않고 내 눈을 들여다본다 자유롭고 당당해야 한다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하고 눌리지 않아야 한다 시인이 되려면 그래야 한다 문배마을로 가는 임도에서 만난 불독사 시인, 시인의 덕목德目, 제1장 1항을 온몸으로 강론한다. - 탄자나이트, 푸른 멍, 문학아카데미, 2014 * '시인은 독사의 .. 2022. 2. 5.
노랫말처럼 [김행숙] 노랫말처럼 [김행숙] 말에 음악을 입혔네, 음악에 말을 입혔지 한 몸이 되어 흘렀어 모든 것이 가능해질 것 같았어 노랫말처럼 나는 네게로 흘러갔으면 좋겠어 잠 없이 꿈꾸다가 문득, 짧은 노랫말처럼 내가 멈추는 곳, 그곳은 어딜까 꿈에서 깨면 왜 슬플까 새는 깃털을 어디에 떨어뜨렸는지 모르지 여름날 누구의 부채 속에서 어떤 바람을 만들고 있는지 모르지 흘러갔다 돌아오지 못한 것들이 있었어 나는 내가 다른 곳에서 흘러왔다고 생각해 생각에는 주인이 없지 문을 다 열어놓고 있었지 -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문학과지성사, 2020 * 얼마전 비긴어게인 버스킹에서 어린 가수들이 god의 길,이란 노래를 불렀다. 노랫말이란 게 누군가의 인생이 담겨 있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앞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수도 있을 .. 2022. 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