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78 오늘의 운세 [권민경] 오늘의 운세 [권민경] 나는 어제까지 살아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툭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올 숲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 치면 일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몸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 2021. 11. 29. 묵시 [조온윤] 묵시 [조온윤] 내가 창가에 앉아있는 날씨의 하얀 털을 한 손으로만 쓰다듬는 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섯 개의 손톱을 똑같은 모양으로 자르고 다시 다섯 개의 손톱을 똑같은 모양으로 자르고 왼손과 오른손을 똑같이 사랑합니다 밥 먹는 법을 배운 건 오른쪽이 전부였으나 밥을 먹는 동안 조용히 무릎을 감싸고 있는 왼손에게도 식전의 기도는 중요합니다 사교적인 사람들의 점심식사에 둘러앉아 뙤약볕 같은 외로움을 견디는 것도 침묵의 몫입니다 혼자가 되어야 외롭지 않은 혼자가 있습니다 밥을 먹다가 왜 그렇게 말이 없냐는 말로 말을 걸어오면 말이 없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다 말이 없어집니다 다섯 개의 손톱이 웃는 모양이라서 다섯 개의 손톱도 웃는 모양이라서 나는 그저 가지런히 열을 세며 있고 싶습니다 말을 아끼기에는.. 2021. 11. 29. 통한다는 말 [손세실리아] 통한다는 말 [손세실리아] 통한다는 말, 이 말처럼 사람을 단박에 기분 좋게 만드는 말도 드물지 두고두고 가슴 설레게 하는 말 또한 드물지 그 속엔 어디로든 막힘없이 들고나는 자유로운 영혼과 흐르는 눈물 닦아주는 위로의 손길이 담겨있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도 통한다 하고 물과 바람과 공기의 순환도 통한다 하지 않던가 거기 깃든 순정한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사랑해야지 통한다는 말, 이 말처럼 늑골이 통째로 무지근해지는 연민의 말도 드물지 갑갑한 숨통 툭 터 모두를 살려내는 말 또한 드물지 - 꿈결에 시를 베다, 실천문학, 2014 * 형은 늘 만사형통을 이렇게 얘기했다. 만사는 다 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앞길을 헤쳐주는 건 형이고 동생은 그 뒤를 따라만 가면 되니까 그.. 2021. 11. 27. 섬 [정용주] 섬 [정용주] 대체로, 소통은 하고 있으나 관여하지 않으면 섬이라 한다 가고자 하면 갈 수 있으나 마음에 두고 있으면 섬이라 한다 고요한 것 같으나 폭풍에 쌓이고 몰아치지만 잔잔해지면 섬이라 한다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면 섬이라 한다 그리워도 오지 않으면 섬이라 한다 그리워도 가지 않으면 섬이라 한다 무수한 섬을 모아 사람이라 한다 - 쏙닥쏙닥,시인동네, 2020 * 재작년 이맘때부터 코로나가 시작되었고 나라 전체가, 아니 지구의 모든 나라가 방역에 몰두하면서 어디에도 갈 수 없게 되었다. 작년에 여름휴가도, 추석때도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올해 설에도 세배는 생략하고 추석때도 전화로만 안부를 물었을 뿐이다. 모든 사람이 각자 섬이 되었다. 자기의 섬안에 갇혀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2021. 11. 27. 이전 1 ··· 49 50 51 52 53 54 55 ··· 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