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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276

창밖이 푸른 곳 [박은지] 창밖이 푸른 곳 [박은지] 그렇게 하면 너의 이름이 지워지는 것입니까 창밖은 푸르고, 우리는 매일 모여 너의 이름을 지운다. 지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오늘 너의 이름은 눈으로 하자. 꼭꼭 뭉쳐도 그럴듯하고, 입속에 넣고 휘파람을 불어도 좋지. 흘러내리는 이름을 물 감 삼아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찢어 이곳저곳에 붙이면 아 름답다. 아름다움을 구경하는 일이 좋았다. 우리는 교탁 아 래 숨겨 놓은 구슬을 찾거나, 잠자리알을 구경하며 서로의 귀를 막아 주었다. 우리가 지운 너의 이름을 모란 무늬 셔 츠에 더듬더듬 새겨 넣는 일도 중요했지만, 창밖 누군가가 손전등을 비출까 겁내는 일도 중요했다. 다시 태어나면 어 쩌지. 의자를 모두 뒤집어 쥐를 찾기도 했다. 한데 모아 작은 웅덩이를 만들자. 오늘 너의 .. 2022. 7. 31.
말의 폭우 [이채민] ​ ​ 말의 폭우 [이채민] 말을 끌고 굴곡진 말의 언덕을 넘는다 선을 넘어서 넘어가고 넘어오는 말 주어가 생략된 동사 형용사가 앞이 보이지 않는 해일을 일으키며 질주한다 위태로운 바다는 그대로 위태롭고 깨진 화분은 그대로 화분의 이력이 된다 바닥인 말을 만나러 부스럭거리는 새벽은 얼마나 부끄러울까 그을리고 깨진 말의 폭우 속에서 맹렬하게 자라나는 가시 꽃은 절망보다 위태롭다 - 까마득한 연인들, 현대시학사, 2022 * 요즘 아이들은 다섯살만 되어도 언어 구사력이 뛰어나다. - 아빠가 날 때리면 경찰이 와서 수갑을 채울 거예요. - 엄마는 나한테 관심이 없어요. 뭐 이 정도면 그래도 양반인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어마무시한 말들은 혀끝에서 자유자재다. 어쩌다 아이들은 '수갑'이라는 말과 '관심'이라는 고.. 2022. 7. 30.
나는 아직 돌아오질 않았네 [이향란] 나는 아직 돌아오질 않았네 [이향란] 이젠 돌려 달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만 돌아가겠다고 해야 하나 나는 아직 내게 돌아오지 않았네 빛은 빛에게 그늘은 그늘에게 시간은 시간에게 돌아가 다시 빛나고 푸르고 소란스럽게 째깍이는데 나는 차마 묻지 못하겠네 왜 내가 돌아오지 않는지 왜 돌아갈 수 없는지 가끔의 너는 나를 구름 속 깊숙이 묻어 놓았다가 어느 날 문득 맑게 씻긴 말들을 건네며 나를 꺼내네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는 오래된 카페의 창가에 앉아 나를 기다리네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거나 음악도 없이 고개를 까닥이며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네 초인종만 울리고 너라는 모퉁이에 잽싸게 숨어 버리는 나를 - 뮤즈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천년의시작, 2022 * 청춘은 아름답다. 헤세가 그.. 2022. 7. 29.
침묵의 미로 [신철규] 침묵의 미로 [신철규] 통화 중에 금방 전화할게, 하고 전화를 끊은 네가 다시 전화를 하지 않는다 나는 전화기 옆에서 서성대다가 열없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책상 모서리를 송끝으로 따라가다가 다시 전화기를 본다 검은 액정 화면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약속이 있고 시간을 어기지 않기 위해 이제는 씻어 야 하지만 전화가 오지 않는다 양치질하는 동안에도 전화가 오지 않는다 입가에 치약 거품을 묻힌 채 전화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샤워기를 틀기까지 또 몇 초간 기다린다 미지근한 기다림이 계속된다 수도꼭지를 돌리니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떨어지고 비누칠을 하기까지 몇 분간 나는 덩그러니 욕조에 서 있 었다 교통사고라도 난 걸까 노트북에 커피라도 쏟은 걸까 행인에게 갑작스럽게 폭행을 당한 건 아닐까 피가 흥건한 단도가.. 2022. 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