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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혼자 공중에서 오래 우는 이가 있다 [조영란] 저 혼자 공중에서 오래 우는 이가 있다 [조영란] 불 꺼진 지 오래 누군가 날 잊는다 해도 서러워할 일은 아닌데 먼 데서 풍경이 운다 아슬아슬한 바람에게 담보도 없이 덜컥 주어버린 웃음이 허공에 눈물을 매달아놓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기어이 풍경이 운다 침묵을 부르는 소리도 있다 절규란 그런 것, 전부였지만 전부를 걸 수 없어 혼자 흐느끼는 소리의 집 바람은 단지 지나갈 뿐인데 체온을 잃고 저 혼자 공중에서 오래 우는 이가 있다 기억할 처음이 없다는 건 기약할 다음도 없다는 것 돌아갈 수도 멈출 수도 없어 스스로 제 낡은 몸을 떨어뜨리는 눈물 녹슨 풍경에게 묻는다 왜 울었을까 왜 울었을까 - 나를 아끼는 가장 현명한 자세, 시인동네, 2020 * 지금 사는 집은 47층 아파트의12층이다. 내 윗집들은 나.. 2022. 2. 5.
종점 의자 [김수우] 종점 의자 [김수우] 네 개 무릎을 세우고 네 개 튼튼한 발목을 갖고 낙타를 닮아갑니다 기다리다, 기다림에 무심하다, 제풀에 종점을 밀고 가는 낮달을 따라갑니다 아무데나 놓여도 숲이 되고 누가 앉아도 크낙새일 수 있도록 극락전을 키웁니다 빛의 발톱에 긁힐 때마다 옹이는 핏줄 선명한 귀가 됩니다 그리워합니다 나뭇가지였을 때 바라보던 저 사람 - 젯밥과 화분, 신생, 2011 * 161번 버스종점. 지금은 그런 번호가 없지만 내가 어릴 때 161번 버스가 있었다. 장위동에서 연신내까지 운행했던 것. 나는 종점에 살았지만 실은 시작점이라 생각했다. 장위동에서 출발한 버스가 연신내에서 유턴해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버스종점이라 불렀다. 나뭇가지였던 저 사람은 어디선가 유턴해서 네발 달린 낙타같은 의자가 .. 2022. 2. 4.
호두에게 [안희연] 호두에게 [안희연] 부러웠어, 너의 껍질 깨뜨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심이 있다는 거 나는 너무 무른 사람이라서 툭하면 주저앉기부터 하는데 너는 언제나 단호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 한손에 담길 만큼 작지만 우주를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너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흐르는 것일까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어떤 위로도 구하지 않고 하나의 자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가졌다는 것 너는 무수한 말들이 적힌 백지를 내게 건넨다 더는 분실물센터 주변을 서성이지 않기 '밤이 밤이듯이' 같은 문장을 사랑하기 미래는 새하얀 강아지처럼 꼬리 치며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새는 비를 걱정하며 내다놓은 양동이 속에 설거지통에 산처럼 쌓인 그릇들 속에 있다는 걸 자꾸 잊어, 너도 누군가의 푸른 .. 2022. 2. 4.
희나리에 대하여 [오태환] 희나리에 대하여 [오태환] 아직 생나무인 장작을 아궁이에 비벼넣고 불을 지피신 적이 있나요 생나무인 채로 불을 살라 보신 적이 있나요 그 때 생나무의 어린 맨살을 적시며 듣는 물방울을 보신 적이 있나요 하얀 맨살에 방울방울 결을 따라 돋아나는 그것들 을 그 따뜻하고 투명한 누선淚腺의 비밀을 햐! 나는 탁탁 튕 기며 타오르는 아궁이의 불과 번갈아 훔쳐본 적이 있는데 요 그때 세상에 비접나온 내 영혼이 왜 그토록 정결히 아 파, 왔는지 지금도 알지 못하는데요 - 별빛들을 쓰다, 황금알, 2006 * 누군가의 아픔을 보고 눈물을 흘릴 때 정금같이 투명한 눈물은 아니어도 울고나면 마음이 시원해지는 느낌 같은 그것. 그것이 누선의 비밀일 수 있는데 살면서 영혼이 맑아지는 때가 있다. 영화를 보다가, 종교활동을 하.. 2022. 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