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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장혜령] 번역자 [장혜령] 이 숲에는 먼나무가 있다 흑송이 있고 물푸레나무가 있다 가지 사이로 새어드는 저녁 빛이 있고 그 빛에 잘 닦인 잎사귀가 있다 온종일 빛이 닿은 적 없던 내부에 단 한 순간 붉게 젖어드는 것이 슬픔처럼 가만히 스며드는 것이 있다 저녁의 빛은 숲 그늘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만들었다 그 속에 새 그림자 하나 날갯짓 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비릿한 풀냄새가 난다 불타버린 누군가의 혼처럼 이 시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이곳을 스쳐지나가고 있다 어디선가 물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꿈속에서 물위에 나를 적는 사람 흔들리면서 내게 자꾸 편지를 보내는 사람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문학동네, 2021 * 월정사 전나무숲길을 얼쩡거린다는 건 자연을 번역하는 일.. 2021. 10. 20.
막막한 시간2 [김승희] 막막한 시간2 [김승희] 지하수가 지하에 있기를 거부하는 시간이 오면 지하수가 땅으로 올라오고 도로는 무너지고 문명의 금자탑은 스러지고 가두리 양식장은 바다로 끈을 뚫고 나아가고 지상의 것들은 속절없이 허물어져 싱크홀 속으로 삼켜지고 이 보다 더 큰 혁명이 있는가 엄마도 당신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내 딸은 아라비안 자스민, 키도 크고 눈에서는 향기가 난다오 댁은 누구셔요? 너는 누구냐 병실 창밖으로 나비가 날아가니 아, 나비······나는 너를 안다 는 듯 환하게 미소짓고 딸을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에 로즈 마리 이리 온 두 마리 조롱조롱한 강아지에 손을 내밀면서도 나만 못알아보는 순간의 너무나도 초롱초롱한 저 눈빛 로즈마리가 자식이요 해가 달이요 병상 모니터가 은하수요 전주가 경성이.. 2021. 10. 19.
견디다 [천양희] 견디다 [천양희]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황새와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는 낙타와 일생에 단 한번 울다 죽는 가시나무새와 백년에 단 한번 꽃 피우는 용설란과 한 꽃대에 삼천송이 꽃을 피우다 하루 만에 죽는 호텔펠리니아 꽃과 물속에서 천일을 견디다 스물다섯번 허물 벗고 성충이 된 뒤 하루 만에 죽는 하루살이와 울지 않는 흰띠거품벌레에게 나는 말하네 견디는 자만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그토록 견디는가 - 지독히 다행한, 창비, 2021 * 살아있다는 건 견딘다는 거다. 하루 하루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자연환경 속에서, 혹은 사회환경 속에서 견뎌내야만 살 수 있다. 견디다 견디다 죽어야만 견디지 않게 되는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혹독한 환경일수록 견디기 어렵지만 .. 2021. 10. 19.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강은교]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강은교]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있을까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서서 찬비 내리면 찬비 큰 바람 불면 큰 바람 그리 맞고 있을까 맞다가 제 잎 덜어내고 있을까 저녁이 어두워진다 문득 길이 켜진다 - 그녀의 푸른 날들을 위한 시, 북카라반, 2020 * 일년에 그저 네,다섯번은 가는 절이 있다. 사철 꽃보는 재미도 있고 곤드레밥을 먹을 수 있어 간다. 아니, 사실은 내가 주페나무라 명명한 나의 나무가 있어 간다. 사백년의 수령을 가진 느티나무인데 내가 산 평생보다 대략 일곱배는 되는 나무다. 그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산 나무이니 존경 받아도 되는 나무다. 변함이 없다는 것도 내겐 큰 위안이 된다. 변하지 않고 견디고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되어준다. 저무는 내 인생에 등불이 되어 주니 아주.. 2021. 10.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