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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번역자 [장혜령]

by joofe 2021. 10. 20.

 

번역자 [장혜령]

 

 

 

 

이 숲에는

먼나무가 있다

흑송이 있고 물푸레나무가 있다

 

가지 사이로 새어드는

저녁 빛이 있고

그 빛에 잘 닦인 잎사귀가 있다

 

온종일

빛이 닿은 적 없던 내부에

단 한 순간

붉게 젖어드는 것이

슬픔처럼 가만히 스며드는 것이 있다

 

저녁의 빛은

숲 그늘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만들었다

 

그 속에 

새 그림자 하나

 

날갯짓 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비릿한 풀냄새가 난다

불타버린 누군가의 혼처럼

 

이 시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이곳을 스쳐지나가고 있다

 

어디선가

물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꿈속에서

물위에 나를 적는 사람

 

흔들리면서 

내게 자꾸 편지를 보내는 사람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문학동네, 2021

 

 

 

 

 

* 월정사 전나무숲길을 얼쩡거린다는 건 자연을 번역하는 일인 것 같다.

아니지, 사랑을 번역하는 일일 수도 있다.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에 수런거리는 나뭇잎들의 대화와

넉넉한 물 흐르는 소리

오래된 나무들이 쓰러져 오래된 냄새를 맡게 하고 

알 수 없는 새들의 지저귐과

다람쥐가 우물거리는 것을 살짝살짝 비춰주는 가을햇살

이 숲에서 이 시각,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감상하며 묵상하는 것이 참 좋다.

한 아름이 아닌 세 아름쯤 되는 나무를 안아보는,

아니지, 안겨보는 것이 삶의 평형을 이루는 일이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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