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자 [장혜령]
이 숲에는
먼나무가 있다
흑송이 있고 물푸레나무가 있다
가지 사이로 새어드는
저녁 빛이 있고
그 빛에 잘 닦인 잎사귀가 있다
온종일
빛이 닿은 적 없던 내부에
단 한 순간
붉게 젖어드는 것이
슬픔처럼 가만히 스며드는 것이 있다
저녁의 빛은
숲 그늘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만들었다
그 속에
새 그림자 하나
날갯짓 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비릿한 풀냄새가 난다
불타버린 누군가의 혼처럼
이 시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이곳을 스쳐지나가고 있다
어디선가
물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꿈속에서
물위에 나를 적는 사람
흔들리면서
내게 자꾸 편지를 보내는 사람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문학동네, 2021
* 월정사 전나무숲길을 얼쩡거린다는 건 자연을 번역하는 일인 것 같다.
아니지, 사랑을 번역하는 일일 수도 있다.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에 수런거리는 나뭇잎들의 대화와
넉넉한 물 흐르는 소리
오래된 나무들이 쓰러져 오래된 냄새를 맡게 하고
알 수 없는 새들의 지저귐과
다람쥐가 우물거리는 것을 살짝살짝 비춰주는 가을햇살
이 숲에서 이 시각,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감상하며 묵상하는 것이 참 좋다.
한 아름이 아닌 세 아름쯤 되는 나무를 안아보는,
아니지, 안겨보는 것이 삶의 평형을 이루는 일이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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