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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떠나는 가족 -이중섭 그림 [윤제림] 길 떠나는 가족 -이중섭 그림 [윤제림] 게랑 물고기는 바다로 돌려보내고 춤추던 새들은 하늘로 날려보내고 바다와 모래밭은 제자리에 있게 하고 구름은 그냥 흘러가게 두고 마침 심심해 보이는 들판의 소한테 사정 얘기를 잘 해서 그 소가 너끈히 끌 만한 달구지나 한 대 빌려서 가장(家長)이 부르면 뒤도 아니 돌아보고 냅다 뛰어오는 식구들만 들꽃 한 다발처럼 싣고서 -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문학동네, 2019 * 가진 것 없어 옷도 변변히 입지 못했으나 자유롭고 여유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떠나는 식구. 부르면 냅따 뛰어오는 이 정도의 사랑이면 어디 간들 못 살 일이 있겠는가. 평생 일만 하는 소와 함께 떠났으니 소처럼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랑하며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수레 굴러가듯 구름 흘러.. 2021. 10. 16.
소로의 오두막 [이문재] 소로의 오두막 [이문재] 월든 호숫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오두막에는 의자가 세 개 있었다고 합니다 친구가 찾아오면 의자 두 개를 마주 놓고 나그네들이 오면 의자를 다 내놓았다고 합니다 홀로 고독을 즐길 때는 의자가 하나만 필요했겠지요 미루어 짐작건대 소로가 혼자 앉아 있을 때에도 의자 두 개가 비어 있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월든 호숫가 숲속 소로가 혼자 들어가 손수 짓고 살던 한칸 오두막에는 침대 하나에 책상 하나 그리고 의자가 세 개 있었다고 합니다 - 혼자의 넓이, 창비, 2021 * 청룡저수지에는 카페와 식당이 즐비하다. 가장 첫번째 집이 '월든 호숫가'라는 찻집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이 집 커피는 마시지 않는다. 맛이 그다지 맞지 않아서이다. 다만 보리수나무며 다래나무며 나무들이 작은 숲.. 2021. 10. 15.
방을 얻다 [나희덕] 방을 얻다 [나희덕] 담양이나 창평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돌아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 있을 곳이 필요해서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 2021. 10. 12.
낡은 소파 혹은 곡선의 기억 [송종규] 낡은 소파 혹은 곡선의 기억 [송종규] 내가 처음 밟았던 문턱의 둥근 부분 구름이 떠메고 가는 구름의 이력서 저물던 바닷가 전화벨 소리, 당신 시시콜콜 인간의 것들 다 기억하는 나를 아주 많은 날짜들지난 후에 지울 수 있으리라 짐작하기도 하지만 당신이라 의심되는 내 안에 저장된 너무 많은 겹겹 당신 그러나 모든 것은 안개, 환유, 공공연한 비밀, 거대한 나무, 당신 꽃 핀 들판이나 낙타의 느린 보폭, 허술한 회계장부 같은 내 낡은 문장에 혹, 당신을 새겨 넣어도 좋을는지 그러나 당신에 대한 기억은 쥐라기 공원, 초인종, 내 몸이 기억하는 난해한 곡선 몇 개 혹, 당신 언제 내 곁을 스쳐 간 적이나 있었는지, 혹 언젠가 나는 당신을 사랑한 적 있었는지 아주 객관적인 햇빛이나 쇠락한 왕조의 뜰 같기도 한 삶.. 2021. 1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