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을 얻다 [나희덕]
담양이나 창평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돌아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 있을 곳이 필요해서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위에 앉아계신 저녁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세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그 부부는 알고 있을까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이미 세들어 살기 시작했다는 걸.
- 그녀의 푸른 날들을 위한 시, 북카라반, 2020
* 빈 방을 세 놓으면 금전적 이득이 생기겠지만
오랫동안 집안의 내력이 깃든 방이라면 타인에게 선뜻 내주고 싶지는 않을 게다.
그것이 도시의 상황이라면 얘기는 달라졌을 수 있다.
특히 대도시의 경우는 세를 놓으려고 했을 테고 집안의 내력은 따지지 않았을 게다.
시골사람들일수록 식구의 손때묻은 집, 혹은 방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게다.
함께 농사를 짓거나 함께 소를 키우거나 뭐든지 함께했던 추억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정갈한 마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 형이나 누나의 사랑이......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고 자라면서 사랑이 흘러넘쳤던 흔적들이 반질반질 묻어있는 까닭이다.
정갈한 마루를 손으로 만져보면 아마도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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